상처뿐인 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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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는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남동쪽 워털루 교외에서 벌어졌다. 프랑스군과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이 맞붙어 쌍방에서 5만5천여명의 젊은이들이 죽어갔다. 참패한 나폴레옹은 나흘 뒤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됐으며,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6년 뒤 그곳에서 숨졌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몇차례 승기를 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일은 공교롭게도 안되는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부하 그루시 원수와 손발이 안맞았고 날씨운마저 따라주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나폴레옹 자신의 판단 미스가 거듭됐다.

이 전투에서 인상적인 것은 승자인 웰링턴 장군(영국)의 품격과 됨됨이가 느껴지는 전투 소감이다. "피해와 손실을 정리한 뒤 몹시 낙담했다. 내가 얻은 이익을 생각해도 전혀 흐뭇하지 않다. 마치 패배한 것처럼 느껴진다…패배 다음으로 가장 크나큰 불행은 승리다."

'상처뿐인 승리(Pyrrhic Victory)'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에피루스의 왕 피로스(BC 318?∼BC 272)에서 비롯됐다. 에피루스는 오늘날의 그리스 서북부와 알바니아 남부에 걸쳐있던 국가. 기원전 279년에 피로스왕은 아드리아해 부근의 아스쿨룸에서 로마군과 큰 전투를 벌였다. 지형은 에피루스군에게 불리했다. 로마군이 포진한 강건너로 코끼리를 앞세워 공격했으나 물살이 너무 빨라 희생이 컸고, 평지 전투에서도 사상자가 속출했다. 양측에서 1만5천명 이상의 전사자를 낸 끝에 전투는 에피루스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크의 기록에 따르면 부하들이 승리에 열광하자 피로스왕은 "이런 승리를 한번 더 거두었다간 우리는 망한다"고 말했다. '피로스의 승리', 즉 '상처뿐인 승리'라는 말은 1885년에 영국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사용함으로써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노무현 후보의 승리로 끝난 이번 대선은 패자는 물론 승자에게도 상처와 과제를 남겼다. 세대·이념갈등 등 선거과정에서 예고된 심각한 후유증을 치유할 통합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이긴 자가 먼저 화합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패자와 그 지지자들이 왜 자신을 반대했는지도 깊이 반성해야 한다.

노재현 국제부차장

jaiken@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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