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바라보는 할리우드의 이중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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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007 어나더 데이'의 제작사에서 '하루라도 빨리 한국 기자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라'고 성화입니다." 북한 군인을 주적(主敵)으로 설정해 국내 네티즌으로부터 '미국식 패권주의의 극치'라는 질타를 받고 있는 '007 어나더 데이'. 이 영화의 배급사인 20세기 폭스는 지난 13일과 14일 갑작스레 예정에 없던 시사회를 열었다. 이미 공식 시사회가 16일로 통보돼 있었고, 비슷한 기간 호주 멜버른에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언론을 대상으로 한 시사회가 열리고 있었기에 갑작스런 국내 시사회는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목적은 진화(鎭火)였다. "일단 영화가 상영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유를 보이던 제작사인 MGM 등이 생각보다 영화에 대한 부정적 소문이 빠르게 번지자 부랴부랴 수습에 나선 것이었다.

폭스 관계자는 "영화를 공개하면 적어도 '007 영화 속에서 한반도가 불바다가 된다더라'는 식의 루머는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폭스는 또 영화 불매 운동에 대비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를 비롯해 인터넷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들이 한국 시장에서의 '적신호'를 감지한 것은 이달 초 영화 속에서 악당 자오를 연기한 릭 윤이 내한했을 때다. 한국계 배우인 릭 윤의 기자회견장은 썰렁하다 못해 적대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취재진의 질문은 온통 미군 무한궤도 차량에 압사한 여중생 사건, 영화 속에 묘사된 한반도 상황의 왜곡 여부에 쏠렸다.

'007 어나더 데이'에 등장하는 북한 악당들은 다른 할리우드 액션영화에서 태연히 대량 살상을 저지르는 이라크나 쿠바·러시아 테러리스트와 별 차이가 없다. 세계 제패의 광기에 사로잡힌 그들은 제임스 본드가 처리해야 할 '악'일 뿐이다. 한국인으로서 이 영화를 보는 심기가 편치 않은 건 이 때문이다. 또 일부 묘사는 북한에 대한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영화 속의 한국은 그저 그런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화 시장으로서 한국이 갖는 의미는 또 다르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 가는 큰 시장이다. 그러니 31일 개봉을 앞두고 영화 보이콧이 이뤄질까 걱정스러운 것이다. 한국을 바라보는 할리우드의 시각은 이처럼 이중적이다.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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