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鄭의 심야 결별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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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민통합21의 정몽준 대표가 어젯밤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 철회를 공식 선언했다. 盧-鄭 단일화의 허망한 종말이다. 투표일 직전의 심야에 벌어진 지지 철회 해프닝은 정치 지도자들의 금도(襟度)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鄭대표의 지지 철회 선언이 전격적으로 나오기까지는 대체로 두 가지 사연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 하나는 盧후보가 서울 명동 유세에서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고 했다는 발언이 직접적 이유다. 미국은 우리 우방이며 북한과 싸울 필요가 하나도 없는데도 이런 발언은 양당이 합의한 정책공조 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 鄭대표 쪽의 설명이다. 또 다른 이유는 합동유세에서 盧후보가 鄭대표를 모독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盧후보가 유세장에서 鄭대표 지지를 외치는 청중을 향해 "너무 속도위반하지 마라. 차기 지도자감으로는 鄭대표 외에도 정동영·추미애 같은 분들이 있다"고 말해 鄭대표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심야의 공조 파기 선언이 있기까지 양측 간에 어떤 불협화음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추측하건대 鄭대표의 합동유세 참여 이후 정책·대우 문제에 있어 미묘한 기류가 흘렀으리라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鄭대표의 이날 지지 선언 철회는 어찌 보면 이미 예견된 것일 수 있다. 그간 정책 조율 과정에서 노출됐듯이 노선과 정치철학이 상이한 양측은 여러 부문에서 부닥쳤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며칠 전 주요 후보 TV 합동토론에서의 盧후보 발언도 한 예로 제시된다. 盧후보는 교육정책 부문에서 鄭대표 측과 정책 조율을 거쳐 공표된 사안임에도 그것은 자신의 철학에 관한 사항이라 양보할 수 없음을 강조한 바 있다. 盧후보의 공조 약속 이행에 의구심을 가져온 鄭대표로서는 국가 안보와 관련한 사안조차 일방적 주장을 펴는 盧후보의 태도를 용납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김행 대변인이 지적했듯이 이날 명동 유세 과정에서 盧후보의 속내를 확인한 鄭대표로서는 더 이상 공조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함을 절감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鄭대표의 지지 철회 결정이 또 다른 철회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정치 지도자가 국민을 향해 맺은 약속을 이런 식으로 파기하는 데 대한 실망과 분노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정치 개혁을 이루겠다는 젊은 정치인들의 공조는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무너졌다. 우리 정치의 장래를 더욱 어둡게 하는 심야의 정치 해프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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