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한국인의 이성적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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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결단의 날이 왔다. 오늘 3천4백99만 유권자들은 제16대 대통령을 뽑는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대를 이어갈 대통령 한 사람을 선택하는 의례적 절차가 아니다. 21세기 들어 처음 실시되는 이번 대선에는 국가와 민족의 명운을 가름하는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역대 어느 대선 하나 의미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난스레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나라 안팎의 급박한 상황 때문이다. 그간의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부정적 현상과 향후 우리 앞에 다가설 국내외 환경은 비장감마저 들게 한다.

이번 선거는 3金시대 청산이라는 역사적 기대감 속에 출발해야 한다. 권위주의 군사정권과 그에 대항했던 민주화 정권이 만들어낸 이른바 3金식 정치의 청산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환점에서 이번 선거가 치러진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지역감정과 패거리 정치, 그리고 친인척 비리로 점철됐던 3金식 정치시대를 마감하고 21세기형 새 정치를 열어야 할 분기점에서 오늘의 선택은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3金정치의 가장 큰 폐단이었던 지역주의의 잔재는 여전하다. 투표를 통해 이런 지역적 고리를 청산하는 모범을 투표자 스스로 보여야 한다.

대선은 현 정권에 대한 심판이다. 정부와 집권당의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가 투표를 통해 매겨져야 한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정당은 없고 후보만 있는 괴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미디어 선거라는 새로운 선거행태가 정책보다는 이미지, 이성보다는 감성 쪽으로만 흐른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새로운 기법으로 자리잡은 인터넷 선거의 흑색선전 유포 등도 미디어 선거의 본령을 훼손하는 데 일조한 감이 없지 않다.

몇몇 후보의 선심성 공약이나 위장(僞裝)을 분별 못하게 하는 상황에는 말바꾸기와 베끼기 못지않게 이성을 마비시키는 감성위주 여론 조작이 작용할 여지가 있었다. 때문에 유권자들은 혼미에 빠져들 수 있고 심지어 우리에게 직접적 위협이 될 북핵 문제에조차 불감증 반응을 보이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나아가 '여중생 압사사건'을 계기로 일부 불순세력이 미군 철수와 반미 투쟁의 기류를 형성함으로써 한·미 관계와 안보가 우려되는 상황을 연출했다. 이런 와중에서 선거의 기본인 현 정권의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는 실종됐다고 본다. 투표란 현 정권의 공과를 묻는 평가행위라는 사실을 유권자는 유념해야 한다.

대선의 본질은 역시 국정운영 책임자를 고르는 일이다. 국가경영이 대통령과 그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면 선택에서의 고려 요소는 분명하다. 후보에게 국정을 안정적·발전적으로 주도할 역량과 자질이 있는지, 그가 품은 비전과 정책은 어떠한지, 그를 보좌할 팀워크는 갖춰져 있는지 등의 요인을 이성적으로 따져보고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젊은 세대의 선거 참여가 대선의 중요 변수로 자리잡은 것도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젊은 유권자들의 투표권 행사가 감성적으로만 행해져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공약과 정보 홍수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왔다. 검증 안된 선심성 정책과 조작된 이미지에 취했을지 모른다. 감성 홍보에 현혹돼 실상을 거꾸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 오늘 우리는 나라의 명운을 책임질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 2002 우리의 선택이 이성적·합리적 판단이었음을 후세가 기록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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