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학자와 심포지엄 내년 개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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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영하의 기온으로 얼어붙은 한반도를 '고구려 열기'로 달구고 있는 '특별기획전 고구려!-평양에서 온 고분벽화와 유물'(2003년 3월 5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 3층 특별전시장)은 전공 학자들을 위한 사랑방 구실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주최 측은 18명으로 이뤄진 학술자문위원회(공동위원장 안휘준·노태돈)를 꾸려 학문적인 검증을 받고 학술심포지엄을 준비 중이어서 관심을 끈다.

전시 개막 1주일을 맞은 12일 오후, 학술자문위원회 2차 회의 현장에서 서길수(서경대·고구려연구회 회장)교수는 "하루라도 전시장을 안 찾으면 허전하다. 고구려에 전염된 것 같다"고 먼저 소감을 밝혔다. 윤명철(동국대 사학과) 교수는 "고구려 미술이 지닌 정신성과 이데올로기를 함축하는 논문이 후학들에게 21세기 통일시대의 새 길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되게 하자"는 뼈있는 말로 받았다.

김홍남(이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고구려 문화를 무덤벽화를 통해 본다는 점이 핵심이다. 출품 수는 적어도 고구려 미술의 정수라 할 중요 유물은 다 온 셈이니 그 예술적 업적을 따져 전시와 학술회의가 나란히 가도록 해야 한다." 강우방(이대 미술사학과)교수는 "이번 전시로 촉발된 참신한 주제를 잡아 답을 못 내더라도 문제 제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나타냈다.

전시장은 고구려의 기상을 실제로 느끼면서 공부하는 현장으로, 의미있는 구실을 하고 있다는 평이다. 교과서만 놓고 하던 밋밋한 교실수업과는 다른 진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서길수 교수는 "전시 구성이 건조하다는 관람객들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형구(선문대 역사학과) 교수는 "앞으로도 몇 달이 갈 장기전이니 만큼 전시물 내용을 날로 새롭게 바꾸는 방법을 연구하고 실행하고 있다. 전시 안내요원도 각 대학 고고미술사학과 학생들로 배치하고, 강연회 개최·홈페이지(gogogo.or.kr) 개설·고구려문화학교 운영 등이 착착 진행 중"이라고 대안을 내놓았다. 시간이 갈수록 더 세련된 전시의 모습을 갖춰 나갈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하게 하는 대목이다.

노태돈(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이번 전시를 남북한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계기로 삼고 싶어하는 듯했다. 그는 "내년 상반기에 열 남북학술심포지엄은 고구려 문화를 변방 문화가 아니라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닌 문화로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북에서 온 학자들과 한자리에서 같은 주제를 놓고 함께 발표한다면 그 일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기대감을 높였다. 안휘준(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말을 거들었다. "고구려 분야는 남북 학자면 그게 세계 최고다. 전시물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미술과 문화'란 주제를 집중 조명하면 좋겠다." 그러면서 안 교수는 "이번 기회에 벽화·서예·조각·금속공예·마구와 무기·도토(陶土)공예·건축·복식·문학·묘제·대외교류·해상활동으로 나눠 밀도 있는 연구성과를 내놓자"고 제안했다.

이종상 서울대 박물관장의 말은 고구려의 의미를 다른 방향으로 되돌아보게 했다. 그가 "1963년 고구려 고분벽화를 만나면서 한국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말했다가 모처에 끌려갔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든다"고 지적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지는 李관장의 말은 전문가로서 자세를 되새기게 하기에 충분했다. "1999년에 어렵게 덕흥리 벽화무덤에 들어갔을 때 다른 동행들은 정장을 입었지만 나는 청바지를 입고 무릎으로 기어다녔다. 바지에 묻은 흙을 나중에 모아 그 안료를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학자들은 회의에서 "이번 전시에 관람객이 얼마나 오느냐보다 북한에서 어렵게 내려온 고구려 유물을 가지고 그 우수함을 전세계에 알리는데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할까 고민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李관장은 특히 "고구려 무덤벽화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도록 우리가 외교적 촉매 작용을 한다는 걸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자리에선 무덤벽화를 잇는 그림 그리기 아이디어도 나왔다. 이 전시의 불길이 우리 민족 혼의 깊이를 달리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얘기에 숙연함마저 느껴졌다.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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