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은 말짱 헛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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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거 막바지에 떠오르는 의문 하나는 "정당이란 과연 무엇이냐"다. 의문은 "책임정치는 실종됐나"로 이어진다. 여러 조사를 종합하면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간발로 앞서는' 모양새다. 盧후보와 통합21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이벤트가 일으킨 상승효과가 유지되고 있다. 여기엔 특정 지역의 지원도 컸다. 또 여권이 장악한 일부 TV매체와 관변 군소신문, 인터넷의 역할도 대단했다. 빗나간 명분을 커버하고 비판자를 공격하는 등 盧후보를 뒷바라지했다.

그렇더라도 궁금증은 안 풀린다. 불과 6개월 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압승을 거뒀다. 국민들은 민주당 정권의 부패·무능을 엄중히 심판했다. 이후 민주당은 상당수 의원들이 盧후보에 등을 돌리는 자중지란에 빠졌다. 이런 두 당이 맞붙었는데 오늘의 현상이 연출되는 것이다.

물론 대선은 후보간 경쟁이 주다. 유권자들은 후보와 공약을 보고 선택한다. 하지만 공약은 미래에 관한 것이고, 따라서 검증 잣대는 공천한 정당의 국정수행 성적표 등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판세에 성적이 반영된 흔적은 눈에 띄지 않는다. DJ가 탈당했고, 盧후보가 DJ를 답습 않는 점을 감안해도 해석이 쉽지 않다. 민주정치의 근간인 정당정치·책임정치가 무의미해질 판이다.

하기야 盧후보는 민주당의 허물을 절묘하게 피해갔다. 盧후보 광고 문안도 한 예가 될 터다. '새천년민주당'은 한구석에 깨알 같은 글자로 돼 있어 찾기 힘들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은 잘려나온 도마뱀 꼬리 같은 '부패정권'에 공세를 집중했으니 허탕쳤다고나 할지. 여하튼 盧후보는 불리한 대목에선 민주당과 거리를 두며 사조직 노사모를 활용했다. 특히 盧후보가 궁지에 몰렸을 때 노란 목도리로 상징되는 6만여 회원의 노사모는 결정적이었다. 그들은 '노무현 바이러스(virus)'를 자임한다. 강한 전염성과 중독증에 비유한 것이다. 바이러스는 '돼지 저금통'으로 자금도 동원했고, 비판자 공격의 전위로 활약하는 등 선전선동·조직확산에 기여했다.

정당조직이라면 여론과 법망을 못 피했을 일도 막후에서 너끈히 해냈다. 폐쇄명령을 탄압시비로 맞서며 시간을 버는 등의 전술·전략 구사는 압권이다. '노란 바이러스'가 선거를 이끈 셈이다. 이러니 정당 무용론(無用論)도 나올 법하다. 그런데 盧후보는 당선되면 민주당을 확 뜯어 고쳐 '노무현당'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DJ양자론'은 피했으니 정치주도 수단으로서 당을 거머쥐려는 의지다.

"얼마 전까지 盧후보는 단일화를 거부하고 DJ 격하를 전략기본으로 삼으려 했다. 우리는 '단일화하면 당신이 된다. 걱정말라'고 설득했다. '당이라는 조직이 간단한 게 아니다. 같은 이유에서 격하운동은 안된다. 차별화는 몰라도. 기존 지지세력이 이탈하면 끝장'이라면서 '견고한 호남표에 영남후보는 필승카드'임을 확실히 했다." 여러 의문점을 풀어주는 청와대 출신 여권 고위 관계자 K씨의 회고담이다.

단기필마의 鄭의원도 통합21을 급조해 바람을 일으켰다. 정당은 없고 후보만 있는 현실은 정당에 대해 근본적 회의를 갖게 한다. 국가경영은 대통령 혼자 하는 게 아니다. 견실한 보좌팀이 당정에 포진해 있어야 한다. 대선이 후보 한사람이 아닌 정당·정책을 망라하는 패키지 선택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런 데 있다. 그러나 그게 보이지 않는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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