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문제도 ‘나’에게 공포감 줄 땐 이슈로 폭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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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정치색 퇴조와 개인성 심화. 최근 2년3개월간 인터넷 블로거 글 6000여만 건(약 100억 개 단어)을 분석한 결과 국내 인터넷 생태계의 이 같은 변화가 감지됐다. 대표적인 게 올 상반기 최대의 이슈였던 ‘천안함 사건’에 대한 반응이었다. 사건 발생 초기에는 ‘가해자(북한)에 대한 분노’의 글들이 인터넷을 압도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에 대한 분노의 감정인 동시에 사망 장병 46명에 대한 안타까움을 뜻한다. 이런 내용의 글들은 사건 발생 이후 급격히 늘다가 4월 29일 합동 영결식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런데 영결식 이후 이 같은 분노의 글들이 점차 사라졌다.

대신 천안함 사건과 관련한 ‘전쟁 공포감’의 키워드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천안함 사건이 전쟁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개인적인 두려움이 급속히 나타난 것이다. 인터넷상에서 특정 시점에 폭발적으로 관심이 집중되는 이른바 ‘온라인 버즈’의 키워드가 ‘분노’에서 ‘공포’로 바뀐 셈이다. 이 시기 선거 관련 키워드 중 사람들이 느끼는 ‘위기 감정’과 관련된 것만 따로 보면 가장 많이 나타난 것이 ‘전쟁’과 ‘군대 문제’였다.

수많은 인터넷 글 속에서 의미 있는 흐름을 잡아내는 것이 ‘텍스트 마이닝 기법’의 핵심 이다. 다음소프트 연구진이 분석 자료들을 보며 토론하고 있는 모습. [김형수 기자]

이들 키워드의 비중은 40%로 금융위기, 경기침체 등 다른 위기 요소를 압도했다. 한마디로 6·2 지방선거를 지배한 것은 ‘전쟁 우려’였다. 천안함 사건 이후 한나라당은 ‘전쟁’, 민주당은 ‘평화’와 결합한 현상도 한나라당의 참패로 끝난 선거 결과를 설명해 주는 요소다. 이와 관련해 국민대 홍성걸(행정학) 교수는 “정부와 한나라당은 천안함 사건을 다루면서 젊은층의 ‘위기의식’에 따른 사이버 여론을 읽는 데 실패했다. 이런 점이 6·2지방선거에서 젊은층 투표율 상승과 여당의 참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포감이 더해지면 폭발=신종 플루 등 위기 이슈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도 개인적 감정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현상이 관찰됐다. 지난해 5월 인터넷 세상. 신종 플루가 이미 한 달 전 멕시코에서 발생했지만 이곳에서는 비교적 잠잠했었다. 아직 ‘남의 일’로 봤던 것이다. 그런데 5월 20일, 이웃나라인 일본 도쿄에서 첫 환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곧 우리 차례’라는 인식이 퍼지며 온라인상의 관심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온라인 버즈 현상은 9월 초 국내 첫 사망자가 나온 직후였다. 공포감이 급속히 퍼지면서 신종 플루 연관어 최상위에 ‘무섭다’‘불안하다’는 단어가 나타났다. 세 번째는 그해 11월 초, 이미 한국도 하루 환자 발생 수가 9000명에 육박해 신종 플루의 대유행 단계에 들어선 시점이다. 연관어 최상단에 ‘아프다’가 올라오고 블로그 포스트에서는 예방접종이나 타미플루 투약을 둘러싼 사연들, 감염을 막고 고통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내용 등이 주를 이뤘다.

그 뒤에는 관심이 확 줄어들었다. 감기나 고혈압처럼 흔한 증상이 되면서 오히려 미지의 것에서 나타나는 불안·공포감이 줄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온라인상의 관심이 폭발하는 시점은 이슈가 ‘나’와 직결될 때라는 공통점이 있다.

◆음모론은 약방의 감초=인터넷상 이슈 확산의 또 다른 특징은 음모론과 결합이다. 대표적인 게 올해 초 천안함 사건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정부의 공식 발표에도 잠수함 충돌설, 미군 어뢰 발사설, 좌초설 등 각종 음모론이 인터넷을 통해 빠른 속도로 퍼졌다.

이같이 인터넷에서 음모론이 잘 퍼지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 흥미로운 스토리(이야기)를 담고 있어서다. 개인성이 심화되는 인터넷 생태계의 또 다른 특성이다. 이와 관련해 연세대 김용학(사회학) 교수는 “인터넷에서는 팩트(사실)보다 스토리(이야기)가 중요하다. 바야흐로 ‘이야기들의 전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야기들의 전쟁’이라는 면에서 봤을 때 촛불시위를 촉발시킨 쇠고기 파동은 정부의 실패였다. 미국산 쇠고기의 유해성을 주장하는 스토리에 대한 대항 스토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온라인 버즈(Online Buzz)=입소문을 통한 마케팅을 설명할 때 쓰이는 ‘마케팅 버즈’에서 나온 말. 이슈가 커다란 트렌드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짧은 기간에 폭발적으로 언급되는 현상이다.



120만 개 블로그의 27개월간 ‘트렌드’ 뽑아내
어떻게 조사했나

‘방대한 문자의 광맥에서 의미 있는 보물 찾기’가 이번 조사의 핵심이었다. 본지와 다음소프트는 현 정부가 출범한 2008년 3월부터 2010년 6월까지 약 2년3개월에 걸쳐 국내 블로그를 분석했다.

인터넷 블로그는 ‘개인 미디어’라는 별칭처럼 운영자의 다양한 관심사와 의견이 나타나는 곳이다. 익명성을 이용해 근거 없는 루머나 논리를 전파하고 악플을 양산하는 댓글·게시판 글과는 성격이 다르다. 정치·사회 문제를 다룬 글들은 신문 등 정제된 기존 미디어보다 편향성이 훨씬 심하다. 스스로 쓴 것보다 다른 곳에서 퍼 나른 글이 많은 것도 한계였다. 따라서 분석 대상의 수를 최대한 늘림으로써 이런 편향성을 줄였다. 조사 대상 블로그는 활동성·영향력 등이 검증된 120만여 개. 2년3개월에 걸쳐 누적된 총 분석 대상 포스트 수는 무려 6000만 건이었다. 단어 수로는 100억 단어가 넘는다. 장기간에 걸친 시계열 분석을 통해 생명력을 갖고 살아남는 의견이나 트렌드를 찾아냈다.

문제는 100억 개가 넘는 단어를 처리할 능력이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 속에서 단어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고, 시간에 따른 변화를 추적해 의미를 찾는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자연언어처리 기술(어휘·구문·의미 분석) 덕분이었다. 수집된 문서들은 스팸 등을 거르는 필터링 작업을 거친 뒤 자연언어처리 기술로 중요 정보를 뽑아냈다.



특별취재 탐사1·2팀 김시래·진세근·이승녕·고성표·권근영·남형석 기자, 이정화 정보검색사, 안상욱(동국대 신문방송 4) 인턴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도움말 주신분 조화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이지만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정재학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 조성준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김용학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윤석민 서울대 언론학과 교수,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생활학과 교수, 한승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송길영 다음소프트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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