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만에 오키나와서 또 美軍 성폭행 사건 日도 "불평등 협정 고쳐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일본 오키나와(沖繩)에서 발생한 미군 장교의 여성 성폭행 미수사건으로 일본에서 미·일 주둔군지위협정(SOFA)을 고쳐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일본 외무성은 4일 도쿄(東京)에서 주일 미군 측과 가진 합동위원회에서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으므로 미군 장교의 신병을 기소 전에 인도해 달라"고 요구했다. 미군 측은 "수사에 협력하겠다"면서도 신병인도 요구에 대해선 답변을 피했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은 이날 "확실한 수사를 위해선 기소 전에 신병을 인도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나미네 게이이치(稻嶺惠一) 오키나와 주지사도 "용의자 신병인도를 질질 끌면 일·미 지위협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엄청나게 거세질 것"이라고 미군 측에 경고했다.

오키나와 주둔 미군인 마이클 브라운 소령은 지난달 2일 새벽 자동차 안에서 아시아계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실패, 달아났다가 미군 헌병에 붙잡혔다. 오키나와 경찰은 브라운에 대해 체포장을 발부하고, 미군 당국에 신병인도를 요청했다. 그러나 주둔군 지위협정 때문에 미국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체포장은 휴지조각에 불과한 실정이다.

미·일 지위협정은 1960년 미·일 안보조약에 따라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 협정이 "미국 측이 미군 범죄인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으면 일본이 기소할 때까지는 미국 측이 범죄인의 신병을 담당한다"(17조)고 규정한 데 있다. 일본은 기소 전에 미군을 구속하거나 제대로 수사할 수 없고, 미군이 증거인멸 등을 통해 처벌을 피할 가능성도 큰 것이다.

이 조항은 95년 오키나와에서 발생한 미군병사의 성폭행 사건에 일본 국민, 특히 오키나와현 주민들이 분노하면서 도마에 올랐다. 이에 따라 미·일 정부는 협상을 거쳐 '살인·성폭행 등 흉악범인 경우에는 미국이 기소 전 신병 인도를 호의적으로 고려한다'고 조항을 수정했지만 별로 구속력이 없어 "근본적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수정조항은 96년 나가사키(長崎)현 미군 강도·살인 미수사건 때 처음 적용됐고, 지난해 6월 오키나와에서의 미군 성폭행 사건 때도 효력을 발휘했다. 오키나와에선 "비난 여론이 비등할 때만 미국이 선심 쓰듯 조금씩 양보한다"는 불만이 많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는 4일 "(조항의)운용방식을 개선해 대처할 수 있다"며 협정 수정 요구에는 일단 소극적인 자세를 나타냈다. 그러나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질 경우 여론을 중시하는 스타일의 고이즈미 총리가 미국 측에 재개정을 촉구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도쿄=오대영 특파원

dayyou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