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美동맹의 존재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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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한국과 미국이 동맹관계를 체결한 이후 과거 어느 때보다 한·미동맹은 지금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한·미동맹 관계가 위기를 맞게 된 것은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반미 데모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의 사태는 한국과 미국의 사법제도의 차이를 잘 모르든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든가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흥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 측 인사들의 사과하는 스타일도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만족스럽다고는 할 수 없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여중생 사망사건 자체를 문제삼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을 보다 근본적인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문제다. 이들의 주장은 남한에서 미군이 나가고 한·미동맹은 해체돼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반세기 전 한·미동맹 관계가 체결될 때부터 좌익세력들이 늘 주장해 온 요구다. 지금 달라진 점은 이러한 주장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을 갖게 됐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면 그렇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원래 동맹 관계는 공동의 위협을 의식할 때 가능하게 된다. 한·미동맹도 냉전이 확대돼 가던 시기에 북방 공산국가들의 위협을 의식해 한국과 미국이 체결한 것이다. 그리고 한·미동맹이 탄생되던 시기의 양극적 국제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한·미동맹은 성공적으로 기능했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함으로써 북방 공산국가들은 효과적으로 견제됐으며 한국은 미군이 보장하는 평화의 조건 위에서 경제성장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산국가들의 몰락과 냉전의 종식은 공산국가들의 위협과 냉전의 지속을 전제로 태어났던 한·미동맹의 존재 이유에 대해 커다란 의문을 던지게 됐다. 물론 북한은 붕괴되지 않았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지만 경제는 실제로 붕괴된 상태나 마찬가지고 군사력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한·미동맹의 환경에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한·미동맹의 목적과 존재 이유는 냉전의 초기단계에 생각했던 것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북한의 전쟁도발을 억제하는 것이 한·미동맹의 존재 이유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변화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한·미동맹의 목적과 기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으로 전제한다면 한·미 관계의 국제적 환경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 한·미동맹은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논리가 지금 '미군은 나가라'고 외치는 반미주의자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냉전이 종식된 후에는 한·미동맹은 전혀 불필요한 존재인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한·미동맹을 해체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 첫째는 냉전은 종식됐지만 북한의 위협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북한은 과거에 비해 크게 취약해졌지만 아직도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화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핵무기 개발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 '강성국가'다. 너무 경솔한 판단은 위험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실 때문에, 만일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경우에는 안보는 말할 것도 없고 엄청난 경제적 위기를 초래할 것이 틀림없다.

둘째로 공산세력의 위협을 막기 위한 동맹은 필요없지만, 공산주의 위협보다 더 무서운 동북아 세력균형의 붕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한·미동맹이 계속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주한미군의 역할은 한반도에 국한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은 한국과 미국이 동시에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반미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도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를 앞으로는 동북아의 지역적 전략균형 문제와 연결해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냉전 종식 후 나토(NATO)와 새로운 국제환경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 과거 냉전시대에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던 북유럽 국가들을 흡수까지 하는 과정을 보면 한·미동맹도 달라진 탈냉전 환경에 능동적으로 적응해나갈 필요가 있다.

사회과학원 원장·고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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