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겨울이 좋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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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인 지난 23일 오전 11시쯤 경기도 포천 베어스타운 스키장. 울긋불긋한 스키복을 입은 여성들이 은빛 설원(雪原)을 질주하고 있다. 가파른 경사의 슬로프도 머뭇거림 없이 쌩쌩 내려온다. 무서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스피드를 즐기는 눈치다. 대여섯 명씩 무리지어 스노보드를 타러온 여성들도 있다. 더러 혼자 스키를 타러 온 30대 여성도 눈에 띈다.

이날 이곳에서 만난 김진형(34ㆍ여ㆍ피부과 의사)씨는 "스키는 자연이다. 확 트인 경관을 바라보며 스키를 타면 세상을 얻은 것 같다. 일도 잘 된다. 스키는 짜릿한 스릴을 안겨준다"고 말했다.

김씨는 하루 40여명의 환자를 봐야하는 바쁜 생활이지만 겨울이면 틈틈이 짬을 내 스키를 타는 스키 매니아다.

"올해는 겨울 스키 여행을 가기 위해 여름휴가도 가지 않았습니다."

김씨의 말이다.

한림대 의대 조교수 박현주(내과ㆍ34)씨는 요즘 왠지 마음이 설렌다. 12월 친구들과 스노보드를 타러 가기로 하고 스키복을 둘러보는 등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박씨는 스키장을 찾기 위해 올해 아예 휴가를 쪼개서 쓴다. 1년에 1주일 정도 낼 수 있는 휴가를 지난 여름에는 이틀만 냈다. 나머지 4일은 이번 겨울에 사용할 예정이다.

여자는 겨울이 좋다. 춥다고 실내에 웅크리고 있는 여성은 이미 구세대에 속한다. 밖으로 뛰쳐나가 추위와 싸우며 강렬한 삶의 향기를 누리려 한다.

스키장을 찾는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과거 스키는 남성 스포츠였다. 강하고 위험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성들의 겨울 스포츠로 각광 받고 있다.

현대성우리조트 관계자는 "90년대 말부터 여성 스키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여자와 남자 비율이 반반 정도 된다."고 말했다.

여성 스키복도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필라코리아의 여성 스키복 매출은 지난 20일 현재 2억3천여만 원(소비자가 기준)이었다. 전년 동기 대비 18%가량 증가했다.

필라코리아 측은 이번 시즌 여성스키복이 전체 스키복 매출의 60%를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는 내달 본격적인 스키 시즌이 시작되면 지난해 말에 비해 25%가량 여성 스키복 매출이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이번 시즌에는 여성 스키복에 대한 디자인을 강화하고 스키복 패션쇼도 여는 등 마케팅을 강화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스키장도 여성 스키어에 대한 마케팅을 강화하고 나섰다. 대명비발디파크는 매주 수요일마다 20~30대 직장을 다니는 여성 스키어들에게 렌탈ㆍ리프트 비용을 50%정도 싸게 해 줄 계획이다.

은빛 설원에 왜 여성들이 늘고 있나.

"질주 그 자체가 좋다. 은빛 설원을 쾌속으로 달리는 기분은 춥다고 실내에 움츠리고 있는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

우폰물산 마케팅팀 이은아(28)과장의 말이다. 이씨는 겨울이면 빠짐없이 스키장을 찾는다. 지난해 데몬스트레이터로 활동했을 정도로 프로급이다. 데몬스트레이터란 한국 대표 스키지도자를 칭하는 말이다.

회사원 민태순(32ㆍ서울 상계동)씨는 또 이렇게 말한다. 민씨는 지난해부터 스키를 탔다.

"스릴 만점이다. 스트레스도 확 풀린다. 더 급한 경사를 정복하고 나면 성취감이 있고 회사일에도 자신감이 붙는다. "

스노보드 매니아 동호회 회원인 강민주(23ㆍ회사원)씨는 요즘 보드 타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그녀는 2년 전부터 스노보드를 배우기 시작했다.

"겨울에는 춥다고 나태하게 있으면 살만 찌고 불안해요.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어 자주 보드를 타죠. 겨울 스포츠는 활동적인 여성의 상징입니다."

베어스타운 관계자는 "90년대 초만 해도 여성 스키어가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남성 못지않게 묘기를 부릴 줄 아는 여성들이 많다. 스키나 스노보드도 여성 스포츠로 변해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김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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