썼다 하면 대박 '폭소 영화'제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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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석에 들어섰다 하면 홈런 아니면 안타다. 호랑이라고 호가 난 김응룡 감독이라도 총애할 만하다. 이 믿음직한 슬러거의 이름은 시나리오 작가 박정우(33). '주유소 습격사건'(전국 2백60만명), '신라의 달밤'(4백50만명), '라이터를 켜라'(1백30만명) 등 최근 3년 새 그가 각본을 쓴 영화는 어김없이 흥행에 성공했다. 여기에 지난 주말 개봉한 설경구·차승원 주연의 '광복절 특사'가 가세했다. 지난 26일 현재 전국 관객 73만여명(서울 28만명)이 들어 벌써부터 '대박'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네 군데서 한꺼번에 '광복절 특사'의 리메이크 판권을 사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이를 두고 충무로에서는 '준비된 흥행'이라고 보는 눈치다. 한정된 시간이나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이를 둘러싼 인간 군상의 코믹한 풍경을 짜임새 있게 풀어놓는 '박정우표 코미디'가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는 얘기다. 물론 그와 세 작품째 콤비를 이뤄온 김상진 감독과의 '완벽 호흡'도 빼놓을 수 없다. 그를 지난 25일 만났다.

1997년 '마지막 방위'로 데뷔한 그는 현재 충무로에서 거의 유일한 '억대 작가'로 꼽힌다. 현재 대부분의 시나리오 작가가 넉넉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는 평균 3천만원대를 달리는 집필료 외에 흥행 수입의 일정 지분을 보너스로 받기까지 한다. 참고로 '신라의 달밤'으로 그가 거둔 수입은 모두 3억7천만원. '광복절 특사'도 손익분기점(1백50만명)을 넘기면 수익의 10%를 받게 된다. 지분을 보장받는 작가라니, 여느 스타 배우 부럽잖은 특급 대우다.

무엇이 그의 몸값을 높였을까. 그는 평범해 보이는 두 가지 이유를 먼저 꼽았다. 첫째는 소위 '대사발'이 좋아야 한다는 것. 가령 이런 거다. '라이터를 켜라'에서 기차역 화장실에서 일을 보던 봉구(김승우)는 청소원 아줌마가 대걸레를 들이대자 이렇게 하소연한다. "아줌마, 저 집중 좀 할게요!"

둘째는 빨리 써야 한다는 것. "초고가 2주일 내로 풀리지 않으면 그 영화는 십중팔구 안된다고 봐야 돼요. 내가 일필휘지로 신나게 써도 보는 사람이 재미있어 할까 말까잖아요." 그런데 집도 장만하고 결혼도 한 지난해부터 '헝그리 정신'이 없어져 점점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고.

마지막 이유가 걸작이다. "자기 몸값을 낮출 줄 알아야 돼요. 내가 제작자면 대뜸 '얼마 줄거냐'부터 묻는 놈한테는 안 맡겨요. 개런티는 자연스럽게 오르게끔 해야죠." 지금까지 히트작만 낼 수 있었던 '행운'도 제작자와 감독을 잘 만나 의기투합한 결과라는 게 그의 겸손 섞인 설명이다.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깡패와 모범생이 교사와 조폭으로 다시 만난다거나('신라의 달밤'), 일회용 라이터 하나 때문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차 타고 간다거나('라이터를 켜라')….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면 뭔가 떠오른다. 가령 '라이터를 켜라'는 화장실에서 큰 일 보다가 담배 한대 피우는 동안 떠올린 거다. '라이터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화장실 벽에 붙였는데 그것 때문에 건물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에이, 빌딩은 '다이 하드'에서 다 써먹었잖아, 그러면 기차에 태워볼까?' 뭐 이런 식이다."

-스스로 꼽는 대표작은. 또 가장 쓰기 힘들었던 작품은.

"대표작은 '주유소 습격사건'이다. 날 키워준 영화이기도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거기서 다 했다. 내 각본이 비슷한 소재를 계속 우려먹는다는 비판이 있는데, 일견 수긍이 간다. 사실 '신라의 달밤'까지만 쓰려고 했다. '광복절 특사'가 제일 애먹였다. '특사 명단에 들어간 걸 모르고 탈옥한다'는 원안이 있었는데, 어떻게 풀어가야 할 지 막막해 처음에는 하지 말자고 했다. 특히 두 죄수가 교도소에 다시 들어가는 대목에서 꽉 막혔다."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사실 내 영화 속 인물을 보면 죄다 비현실적이다. '광복절 특사'에서 밥숟가락 하나로 6년 동안 굴을 파는 무석(차승원)처럼. 그런 사람들의 단순 무식함과 우직함이 좋다. 어리버리한 사람들이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영웅이 된다는 결말이 재미있고 통쾌하다."

-각본 쓰는 보람을 느낄 때는.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극장에 슬쩍 간다. 내가 쓴 이야기를 보고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는 걸 보면 엄청난 희열이 느껴진다. 남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 '신라의 달밤'에서 패싸움을 앞두고 '오늘 우리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거다…돌격!'하는 주섭(이종수)의 대사가 있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내 이름 석자를 남기고 싶은 게 소원이다."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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