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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자산업서 중국이 배울 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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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은 첨단 전자산업 분야에서 어떻게 세계의 선두가 될 수 있었는가. 최근 이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새로운 관점은 삼성.LG.현대 등이 해외 다국적 기업과 긴밀하게 협조하며 성장했다는 점을 주목한다. 한국을 모델로 생각하는 중국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에는 아시아 호랑이(한국)의 급속한 성장을 설명할 때 홍콩.싱가포르와 비교했다. 홍콩.싱가포르가 해외 투자자들을 끌어들여 성장의 발판으로 삼은 반면 한국은 자국 산업을 키우기 위해 외국 기업의 직접 투자를 막았다고 본 것이다. 대만은 그 중간쯤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수정주의적 관점은 4개국이 더 닮았다고 본다. 한결같이 토착 전자회사들이 해외 투자자들과의 계약 관계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토착 기업들은 다국적 기업의 부품을 제조하면서 싹텄다. 이 관계를 통해 정밀도가 높은 생산기술을 사용하고 선진 부품을 썼다. 세련된 품질관리 절차를 도입했다. 해외 바이어들의 직접 관리를 받으며 조직적인 운영을 배웠다.

전자산업 부문에서 개가를 올린 한국 기업들도 이런 과정을 통해 성장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삼성.LG.현대 등 한국 전자업체들의 수출량 60~70%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계약을 통해 이뤄졌다. 한국 정부가 해외 자본의 직접 투자를 제한하던 때도 한국 기업들은 해외시장을 뚫기 위해 다국적 기업을 '선생님'으로 활용했다.

대만 전자업체들도 처음에는 계산기.시계.VCR 부품을 판매하다가 점차 IBM.필립스.히타치에 파워 서플라이.모니터 등을 납품했다. 에이서(ACER).타퉁(Tatung).마이탁(Mitac) 등의 대만 컴퓨터 회사들도 OEM으로 조립해 공급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이렇듯 한국.대만은 홍콩.싱가포르와 공통점이 많다.

이들은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배운 것을 충분히 활용했다. 처음에는 계약 제조에서 OEM으로, 다음에는 모방.혁신을 무기로 ODM으로 옮겨갔다. ODM은 제조자 개발 생산방식이다.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는 삼성이었다. ODM 다음에는 선진국 기업들과 경쟁하면서 OBM으로 발전하는 것이었다. OBM은 '오픈-북 경영'이다. 회사 경영 정보를 철저하게 공개, 직원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관심을 끌어내는 경영 방식이다. 이런 단계적인 발전 모델은 외국 자본이 100% 투자한 기업이 국내 기업들과 선진화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준다. 현재 중국의 낡은 개발 전략과는 극명하게 다르다. 중국은 합작 벤처를 의무화해 억지로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또 다양한 압력을 넣어 자국의 산업 역량을 키우려 하고 있다.

합작 벤처를 의무화해 중국 기업을 키울 것인가, 외국 자본이 100% 출자한 기업을 허용할 것인가.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이다. 그러나 합작 벤처 의무화는 이미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점이 증명되고 있다.

중국에 있는 442개 다국적 기업을 연구한 롱 구오키앙 박사의 논문(국제경제연구소.IIE서 출판 예정)은 이를 뒷받침한다. 외국 자본이 더 많이 출자된 회사일수록 첨단 기술을 더 많이 쓴다는 것이다. 예컨대 외국 자본 100% 출자기업의 32%가 모기업과 동일한 첨단기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중국 자본이 더 많은 지분을 가진 합작회사는 6%만이 첨단기술을 쓰고 있었다. 특히 중국 기업과 합작한 다국적 기업들이 첨단 기술을 사용하기 꺼리는 분야는 반도체.컴퓨터.통신사업 등이다. 중국이 첨단전자 부문에서 성공하는 것은 기대보다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시간의 길고 짧음은 새롭게 평가되고 있는 한국의 발전 모델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시어도어 H 모런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정리=이은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