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조직 개편이 능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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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언제부터인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또는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행정개혁·정부혁신 등을 내세우며 행정부를 온통 뒤흔드는 것이 관례처럼 됐다.

국민에게 봉사하는 생산성 높은 정부를 만든다는 명분이 항상 앞세워지지만, 그 명분을 믿었던 국민은 늘 배반당하고 만 것이 현실이었다.

오랜 경험을 통해 외국에서는 이미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무능·실책을 감추고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고 무모한 행정개혁을 단행하는 것에 대해 경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요즘 또다시 나오고 있는 정부 조직개편 논리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확보를 위해 정부의 시장 간여와 제왕적 대통령의 힘을 줄이자는 것이고, 다음은 부처 간 통폐합을 통해 규모는 효율적으로 줄이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자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세계적 환경 변화에 대응하려면 새로운 정부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얼핏 합당하게 들릴지 모르나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확보한다는 것은 정부의 기능적 문제이지 조직의 문제가 아니다. 그간 각종 위원회를 만들어 경제부처의 시장개입을 약화시키고 권부의 기능을 통제하려고 해보았지만, 결국 기존의 정부기관을 그대로 두고 기능조정만 하는 것보다 훨씬 못한 결과를 나았을 뿐이다.

신설 위원회들은 모두 시장개입을 강화하고 있거나, 권부로 발돋움하기 위해 수사권 등의 각종 권한을 요구하며 사회경제적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지 않은가.

부처 통폐합이 효율성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할 것이라는 것도 이미 여러 차례의 경험에 의해 근거 없음이 밝혀졌다. 우리 공무원 인사제도는 조직이 없어진다고 해서 그 자리에 있던 공무원을 퇴직시킬 수 없도록 돼 있다. 오히려 두 정부기관이 합쳐지면서 매머드 기관이 만들어지고, 이질적 집단 간의 갈등으로 행정은 더 비효율적이 되며, 순환보직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공무원의 전문성은 더욱 약해질 뿐이다.

세계 환경변화에 따른 정부기능의 변화 역시 정부 조직개편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정부 구조 속에서 기능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와 똑같이 세계적 환경 변화를 겪고 있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우리처럼 수시로 정부조직을 바꾸지 않고도 우리보다 오히려 적응을 잘 하고 있는 것은 작은 기능 변화로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정부조직 개편은 정치권이나 일부 개혁론자들이 내세우고 있는 목적에 합당한 수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간의 정부조직개편은 합리적 논리에 근거했다기보다 혼돈스러운 정치적 과정과 각 부처 이기주의, 개혁 '브로커'들에 의해 결정돼 왔기에 더욱 큰 문제를 낳았다.

정부조직법 개편안은 국회를 통과하면서 각 부처와 이익집단들의 로비·압력에 의해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변질됐다. 그 결과 현재 우리나라의 정부조직은 기형적 형태가 됐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하더라도 종전에 비해 전혀 나아진 바 없는 정치적 과정을 거쳐야 하는 정부조직개편을 다시 시도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지금 정부조직개편보다 시급한 것은 정부 기능과 책임의 합리적 재조정이다. 여러 번의 조직개편을 거치면서 각 부처·기관들은 자신들의 기능에 대한 명료한 개념이 흐트러졌고, 책임 소재도 불분명해졌다. 부처 간 소관 분야 확보를 위한 갈등이 빚어지고, 무리한 통폐합을 한 부처에서는 기관의 비전이 상실되거나 불명확해짐에 따라 부서 간 갈등이 심각하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 다시 정부조직개편을 시도한다는 것은 행정 혼란만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부처 생존을 위한 이전투구가 또다시 벌어지면서 행정 공백을 불러올 것이다.

경제·정치적으로 선진국이라 할 나라들 중에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비합리적인 정부조직구조를 가진 채 운영의 묘를 살려 생산적 정부를 잘 이끌어가고 있는 사례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새 정부는 무모한 정부조직개편보다 기능분석과 재조정을 통한 차분하고 점진적인 행정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순리다. 국민은 이제 진정 국가를 운영할 줄 아는 새 정부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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