重油 실은 배는 어디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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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마키아벨리는 "무장한 지도자는 승리하고 무장하지 않은 지도자는 파멸한다"고 말했다. 마키아벨리에서 5백년이 지난 오늘 그의 충고를 가장 잘 따르는 정치가의 한 사람이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다. 부시는 대량살상무기를 해결하려고 이라크를 무력으로 위협하고 북한을 무력 아닌 최강의 방법으로 압박하고 있다.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잠깐 등장하는 트로이의 공주 커샌드러는 아폴로 신(神)한테서 미래를 정확히 예언하는 초능력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아폴로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커샌드러에 대한 복수로 그녀의 예언을 아무도 믿지않게 만들어버렸다. 커샌드러는 설득을 하면 상대가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딱한 사람의 대명사가 됐다.

북한 문제에서 부시가 마키아벨리의 충실한 제자라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부시를 상대로 커샌드러의 역할을 맡은 꼴이다. 金대통령은 북한의 진심은 핵무기 개발이 아니라 미국과의 대화를 통한 체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역설하지만 부시는 믿지 않는다.

중유 4만3천t을 실은 배가 북한을 향해 북상하는데 미국은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 포기를 선언하지 않으면 배를 회항시키겠다고 말한다. 한국은 그래도 중유지원을 계속해야 제네바 합의가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북한 문제에 관한 한·미 간의 거리는 마키아벨리와 커샌드러의 거리 같이 멀어 보인다.

지난주 도쿄(東京)에서 중유 문제에 합의를 보는 데 실패한 한국·미국·일본은 내일 뉴욕에서 열리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이사회로 공을 넘겼다. 북한의 신포에 짓고 있는 경수로의 예상되는 건설경비 46억달러의 나라별 부담 비율은 한국이 70%, 일본이 정액(定額)으로 10억엔, 유럽공동체는 매년 1천5백만∼2천만유로 정도다. 미국은 해마다 난방과 발전(發電)에 쓸 5천만t의 중유, 금액으로 치면 8천만달러에서 9천만달러를 북한에 제공한다. 표결에서는 한·미·일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실제 발언권은 당연히 미국이 제일이다.

미국이 중유 제공을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어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미국을 설득한다고 해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중간선거에서 압승한 부시는 불량국가 다루는 데 더욱 자신만만하다. 그렇다고 타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공해를 북상 중인 4만3천t의 중유는 2002 중유회계연도의 마지막 3회분의 첫 번째 분이다. 12월과 내년 1월에 한 번씩 더 간다. 11월분은 제공하되 핵개발 프로그램 포기에 관한 북한의 책임 있고 신뢰할 만한 약속이 없으면 12월분부터는 중유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해 북한에 통보하는 선에서 절충할 것으로 예상된다. 모두가 수락할 만한 방안이다.

북한은 핵개발 프로그램을 덜렁 고백해놓고는 그 파문에 불안한 모습이다. 지난 9월 북한 외무성 부부장 강석주(姜錫柱)가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에게 한 말은 분명히 제네바 합의가 깨졌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姜부부장은 지난주 평양에서 만난 미국의 전 주한대사 도널드 그레그와 언론인 돈 오버도퍼에게는 제네바 합의가 "실낱에 매달려 있다"고 말했다. 제네바 합의가 위독하지만 죽지는 않았다고 한발 물러선 것이다.

미국이 중유 제공을 아주 중단한다고 선언하면 북한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실낱에 매달려 있던 제네바 합의가 맨바닥에 떨어져 죽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는 궁지에 몰린다. 그렇게 되면 단기적으로는 북한이 1994년에 동결한 영변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재개하는 시늉을 하거나 실제로 재개하고, 한반도는 다시 바늘 끝 같은 위기를 맞을 것이다.

중유 4만3천t은 국제시세로 6백90만달러 정도다. 큰 돈은 아니지만 그것이 가고 안가고의 상징적인 의미는 크다. 완전중단이든 일시중단이든 중유에 관한 결정은 그것이 제네바 합의의 파기를 의미하지 않고, 북한이 하기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재개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동반하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징조로 봐서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를 갈망한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동기에 있어 체제 유지가 경제적인 이유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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