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51) 박정희 5·16의 토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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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총리를 비롯해 5·16 뒤 정계와 군, 중앙정보부 등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사람들이 정보국에 갓 들어온 육사 8기생의 명단에 들어 있었다. 앞에서 인용한 최영택 예비역 대령과 고제훈·이영근·서정순·석정선·이희성·전재덕·이병희씨 등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왼쪽)이 1961년 5·16을 일으킨 뒤 최고회의 의장직에 있을 때인 62년 12월 대규모 방한단을 이끌고 찾아온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오른쪽)를 맞이하고 있다. 가운데는 육사 8기생으로 박 전 대통령과 정보국에서 함께 일하다 중앙정보부 창설 멤버가 됐던 최영택 주일대표부 참사관이다. [중앙포토]

나는 이들이 정보국 각 부서에 배치돼 열심히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 대통령에 오르는 박정희 전투정보과 문관과 육사 8기생 일부가 함께 정보국에서 어울린 점은 지금 생각해 봐도 아주 공교롭다. 나중에 전쟁이 터진 뒤 군문에 복귀해 소장으로 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이들 육사 8기생 일부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우연치고는 커다란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전투정보과에 배치된 육사 8기생은 김종필과 이영근·이병희·전재덕·전재구·석정선·서정순 소위 등 10여 명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5·16 거사 뒤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그 핵심 간부 자리에 오른다. 박정희를 도와 5·16을 성공적으로 이끈 뒤 권력의 한복판에 진입해 그와 부침(浮沈)을 함께했던 풍운(風雲)의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처음 만나 어울리는 상황은 그러나 썩 유쾌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문관 박정희는 당시 남로당 군사책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간신히 형 집행정지를 받고 겨우 살아난 뒤 주위의 눈치를 보며 생활하는 형편이었다.

그에 비해 육사 8기생들은 나름대로 철저한 사상교육을 받은 뒤 조국의 방패로 나선 피 뜨거운 젊은 군인들이었다. 좌익 혐의자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경각심과 함께 무시하거나 깔보는 듯한 태도를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처음부터 어울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서먹서먹했던 분위기였고, 물과 기름이 서로 결합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박정희 본인도 자신의 혐의 사실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에 전전긍긍하면서, 자숙하거나 근신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 이들 사이는 소원하다고 할 정도로 거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최영택 예비역 대령은 당시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전투정보과의 큰 상황판 테이블 가운데에 앉아 있으면서 누구와도 잘 말을 주고받지 않는 모습이었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사무실에서 삼삼오오 모여 서로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도 박 전 대통령은 팔로 머리를 감싸안은 채 상황판 앞에 고개를 수그리고 앉아 남과 어울릴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최영택씨는 최소한 정보국에 막 발을 들여놓은 8기생에게 그런 박정희가 낯설면서도 가까이 하기에는 뭔가 어색한 존재라는 식으로 치부되곤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박정희는 늘 혼자 앉아 있다가 퇴근 무렵에는 직장의 동료 한두 사람과 조용히 만나 술집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그 무렵의 박정희는 자신의 적적함을 달래줄 술친구 한두 명과 어울렸다고 했다. 나중에 서울신문 사장을 한 장태화씨도 그 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 8기생은 6·25가 터진 뒤 육군본부를 따라 대구로 내려간 뒤 매우 친밀한 사이로 변했다. 김종필 총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가 되는 것도 그 무렵이었고, 나머지 8기생 또한 과묵하지만 치밀한 업무능력을 보였던 박정희를 외경심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어느덧 그를 추종하는 세력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거의 외톨이로 지내다 퇴근 무렵에야 술친구 한두 명과 겨우 어울렸던 박정희는 대구 피란 시절의 정보국에서 8기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으로 변신했다. 인간 박정희는 그가 숙군 작업에 걸리기 전까지 인간적으로 깊은 교분을 나눴던 김점곤 예비역 소장의 기억에 따르면 늘 ‘변혁(變革)’을 꿈꾸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김점곤 장군은 “숙군 작업 훨씬 전인 춘천 8연대 시절 중대장인 나는 소대장으로 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늘 퇴근 뒤에 술을 마셨는데, 술만 취하면 이 사람은 꼭 ‘2·26사건(일본 우익 청년장교 1483명이 1936년 일으킨 우익 쿠데타)’을 거침없이 찬양할 정도였다. 대한민국이 출범하기 전이었던 그런 상황에서 변혁에 대한 큰 갈망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뱉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피란 시절의 대구에서 퇴근 뒤 늘 박 전 대통령과 술자리를 통해 어울렸던 같은 부서의 젊은 육사 8기생들은 알게 모르게 그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가슴속 깊이 묻어 놓았던 박 전 대통령의 강한 열망은 그를 존경심과 외경심으로 지켜본 육사 8기생들의 힘을 받아 5·16으로 이어진 것인지 모른다.

나는 군인이 정치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5·16이라는 군인의 정치적 행위를 근본적으로는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런 과정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 뒤 대한민국 산업화의 초석을 공고하게 다졌다. 대한민국을 세계적인 국가 반열에 올린 토대를 쌓은 것이다. 그 모든 결과에 대한 평가는 훗날 역사가들이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6·25의 회오리가 한반도를 휩쓸기 직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보국에서 목숨을 건졌고, 육사 8기생이라는 자신의 든든한 후원 세력을 얻었다. 군인은 항상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입장의 내가 그들을 그런 자리에서 조우(遭遇)케 한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역사는 때로 그런 역설(逆說)을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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