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와 싸운 개혁가 광해군 다시세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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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성 연출가 한태숙(53)씨는 온통 한 사내에 정신이 팔린 채 가을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연출한 작품 목록 가운데 사내를 주인공으로 다룬 게 드물었던 탓에 상사병은 더욱 깊은 것 같다.

"그는 한없이 열린 가슴을 가진 섬세한 매력남이었다." 한씨가 이토록 멋진 조선시대의 사내로 꼽는 인물은 광해군이다. 일반인들에게는 패륜적인 '혼군'(昏君·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으로 규정되어 온 사람이다. 한씨는 이런 '오해의 역사' 속에서 그를 불러와 오늘의 관객과 어울리는 씻김 무대를 마련했다. 6∼13일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광해유감'이 그런 자리다.

"선조와 광해, 그리고 그 사이에 미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목대비 김씨 등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동시대를 산 사람들의 이야기다." 연극의 시대 배경은 선조·광해·인조(능양군)로 이어지는 조선 중기다. 임진왜란 등 격변기의 중심에 광해를 놓고 그 주변 인물들과의 피말리는 권력쟁투와 관계망을 다룬다.

요즘 TV 사극의 인기가 증명하듯이 궁궐 구중심처의 이야기는 뭇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소재다. 그것이 비생산적인 암투일색으로 치닫지 않는다면 '역사 다시 보기'의 참고서로도 여길 가치는 충분하다. 적당한 허구는 드라마의 맛을 돋우는 양념이다.

'광해유감'은 픽션과 사실(史實)의 경계선을 오가는 가운데 작가·연출가의 해석적 안목이 추가되는 게 특징이다. 특히 광해에 대한 한씨 나름의 해석은 크게 두가지로 모아진다. "광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치열한 붕당정치에 유린당한 고단한 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권력의 탐욕스런 속성에 침을 뱉으며 권력의 한가운데에 백성을 세웠던 임금이었다."

당쟁의 와중에서 광해는 형인 임해는 물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면서도 개혁 군주로서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민주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양면성을 보인다.

연극은 다양한 등장인물을 배치해 이런 논쟁적인 에피소드들이 곳곳에서 살아나도록 한다. 광해·선조·인목대비 외에 소북·대북 당파의 양날인 유경영과 이이첨, 선조의 후궁 인빈, 광해를 흠모하였음에도 나중 배반하는 상궁 개시 등이 각기 제 색깔로 역사를 물들이고 싶어했던 인물들이다.

원래 '광해유감'은 신예 극작가 임은정이 지난해 삼성문학상 희곡 부문에 응모했다가 둘이 겨루는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신 작품이다. 이때 심사위원이었던 한씨는 "이거다 싶었지만 대세론에 밀려 다른 작품을 낙점했다"고 한다. 소재가 참신해 그냥 버리기는 아깝다고 여긴 한씨는 지난 두달 동안 작가를 집에 불러 10여 차례의 개작을 거듭한 끝에 최종본을 완성했다.

바로 이런 집요함이야말로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한씨의 개성이다. 쉰이 넘은 나이에도 외모에서는 소녀티가 엿보이지만 내면에 품은 연출가적인 독기(혹은 광기)는 '악명'이 높다. '레이디 맥베스''배장화 배홍련' 등 갈등의 예각을 때리는 작품을 선호하는 것도 이런 성격이 한몫을 한다. 한씨는 "물리적인 충돌이기는 하지만 싸움은 곧 에너지"라며 "그 힘에서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런 한씨가 얽히고 설킨 이 원한의 드라마를 외면할 리 없지 않은가.

한씨는 배우 고르기 또한 꽤 까다로운 편이다. 상투적인 연기를 경계해 늘 참신한 인물을 물색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번 작품에서도 '새 술은 새 부대'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선조 역의 원로 연기자 오현경, 인목대비 역의 장영남이 대표적이다. 광해 역은 '덕혜옹주' 등에서 한씨와 함께 했던 한명구가 맡았다. 이밖에 홍원기·김병옥·지영란·송희정 등 연기파들이 가세했다.

평일 오후 7시30분, 금·토(최종일 포함) 오후 4시30분·7시30분, 일 오후 4시. 02-764-8760.

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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