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중소기업’ 솎아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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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국내 1위 제빵회사인 A기업의 자회사는 최근까지 국방부에 매년 수십억원어치의 햄버거용 빵 등을 납품했다. 국방부에 공급되는 빵은 ‘중소기업 간 경쟁제도’가 적용돼 대기업은 원칙적으로 참여할 수 없도록 돼 있다. 관련 업체들이 2007년 말부터 “중소기업 영역 침해”라고 호소했지만 정부 기관에선 “자본금 50억원, 상시 근로자 120여 명으로 중소기업 기준을 충족한다”는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다. 이 회사는 지난 5월에야 국방부 공급을 중단했다.

이렇게 내용적으로는 대기업 계열사, 혹은 ‘그룹형 중소기업’이면서도 각종 정부 지원을 노리고 중소기업 행세를 하는 이른바 ‘무늬만 중소기업’에 대해 중소기업계가 실태조사에 나섰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위장 중소기업’으로 인한 중소기업의 피해 실태를 접수하고 있다고 8일 밝혔다.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에게 돌아가야 할 정부지원금이나 세제·금융 혜택을 받거나 중소기업 사업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를 막기 위한 것이다. 서류를 허위로 만드는 등의 방법으로 중소기업으로 인정받은 경우가 신고 대상이다. 중기중앙회는 13일까지 접수한 신고 사례를 토대로 조사 보고서를 작성해 이달 중 공정거래위원회와 중소기업청 등에 제출할 계획이다.

중소기업은 조달청의 입찰과 공공기관 구매에 참여할 수 있으며 연구개발, 경영안정, 사업전환 등에서 저리의 정책자금을 지원받는다. 중소기업청 소관 예산은 1996년 2조4000여억원에서 지난해 11조9000여억원으로 늘었다. 이 같은 혜택을 누리기 위해 중소업체들은 규모가 커지면 자회사 설립이나 기업 분할, 비정규직 근로자 채용, 아웃소싱 등의 방법으로 중소기업 지위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부에서는 가족이나 지인을 대표이사로 내세워 ‘그룹형 중소기업’을 만들기도 한다. 대기업 계열사가 서류를 허위로 만들어 당국을 속이는 도덕적 해이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정작 보호받아야 할 중소기업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실정”이라며 “중소기업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위장 중소기업의 공공구매시장 참여 제한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도 ‘무늬만 중소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중소기업청은 최근 입법예고된 중소기업기본법 개정안에 정부 지원 등을 이유로 서류를 허위로 만들어 중소기업으로 인정받는 기업주에 대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규정을 신설했다. 중소기업청 관계자는 “지금까지 자산 2조원 이상 대기업이 아니면 (대·중소기업을 구분하는) 지분관계를 엄중히 따지지 않았다”며 “앞으로 허위 서류로 중소기업으로 인정받은 업체에 대해 사업비를 환수하는 등 제재 수위를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중소기업에 적용되는 혜택을 받으려면 매출액이나 상시 근로자 수, 자산총액 등이 일정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제조업체의 경우 상시 근로자 수가 300인 미만이거나 자본금이 80억원 이하여야 한다.

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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