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당국-반군, 서로 굴복 요구 대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러시아 모스크바 도심에서 빚어진 사상 최악의 인질극이 범행을 주도한 체첸 반군과 러시아 당국이 서로 굴복을 요구하는 가운데 나흘째를 맞았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25일 인질들을 먼저 석방하라고 요구한 데 대해 체첸 반군 측은 요구조건부터 수락하라며 맞서고 있다. 이들은 특히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당초 통보한 수락 시한인 26일 새벽(한국시간 26일 오전) 인질 처형을 개시하겠다"고 위협했다.

◇서로 "양보하라"=니콜라이 파트루쉐프 FSB 국장은 25일 크렘린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회동한 뒤 '인질 석방 후 반군 생명 보장'방침을 발표했다. 그는 "반군 측과 대화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라며 "전세계 60개국 정보·안보 기관들이 사태 해결을 위해 우리와 협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파트루쉐프 국장은 이에 앞서 "반군들이 인질을 풀어주면 제3국행을 보장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반군 측은 ▶러시아군이 1주일 내에 체첸에서 철수하고▶체첸 전쟁을 중단해야 한다는 당초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인질들을 사살하겠다고 경고했다고 FSB 대변인이 밝혔다. 반군들은 "우리는 죽을 준비가 됐고, 그럴 경우 인질들도 함께 데려가겠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측은 이에 앞서 25일 새벽 17개국 출신의 외국인 인질 75명 전원을 석방하기로 합의했지만 반군들이 이유없이 석방을 연기했다.

◇언론들 푸틴 비난 봇물=러시아 언론들은 "반군들이 두달 전부터 2t의 다이너마이트를 체첸에서 1천5백㎞를 운반해 크렘린궁 코앞까지 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며 "러시아의 전술·전략적 안보시스템에 구멍이 뚫렸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언론들의 비난은 특히 푸틴 대통령에게 집중됐다. 일간지 네자비시마야 가제타는 24일 "굴욕적인 사태"라며 "환상은 끝났다. 이제 아무도 강력한 국가에 살고 있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푸틴 정권을 공격했다. 이 신문은 "푸틴이 인질들의 석방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한 정치평론가의 글을 실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란에 억류된 미국인 인질의 석방에 실패함으로써 재선되지 못했다. 신문은 또 "푸틴 대통령은 체첸 문제를 내부 정치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해왔다"며 "앞으로 체첸에 대한 모든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혁 성향의 일간지 브레먀 노보스테이도 "체첸 반군이 러시아 정부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고 지적했다.

◇각계 석방 교섭 무위=러시아 야블로코당의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당수, 이리나 하르카마다 의원 등 러시아 의원들과 국제적십자사·국경없는 의사회(MSF) 등 국제단체들이 반군들과의 인질 석방 교섭에 매달렸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곡으로 유명한 '백학(白鶴)'을 부른 가수이자 정치인인 요시프 카브존도 협상에 참여했다. 백학은 체첸 유목민 전통가요이기 때문에 카브존 의원도 체첸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사태가 장기화함에 따라 인질 중 폐렴·간질·고혈압 등의 환자들이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위급한 상태라고 현장을 방문한 의사들이 밝혔다.

모스크바=안성규 기자, 외신종합

askm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