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감동을 만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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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7면

밸런타인 데이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사랑에 빠지는 남녀. 물론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다. 그런데 이 지독히도 낭만적인 설정의 원조는 따로 있다. 바로 극 중 멕 라이언이 온통 눈물로 뒤범벅돼서 보던 영화 '어페어 투 리멤버(An affair to Remember·1957년)'다.

데보라 카와 케리 그랜트가 호흡을 맞춘 이 영화는 1994년에 워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의 '러브 어페어'로 다시 만들어졌다. 사실 '어페어 투 리멤버'도 39년의 오리지널을 리메이크한 것이지만 말이다.

얼마 전 국내에도 이 영화가 DVD로 출시됐으니, 멕 라이언을 천하의 울보로 만들었던 바로 그 장면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최근 국내 DVD 시장이 활성화하면서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오리지널 고전들이 출시되고 있다. 열한명의 쿨 가이들의 유쾌한 사기극 '오션스 일레븐'도 리메이크다. 원작은 '서부전선 이상 없다'로 유명한 루이스 마일스턴 감독이 60년 만들었던 같은 이름의 작품이다. 리메이크가 조지 클루니·브래드 피트 같은 스타들의 향연이듯, 오리지널 역시 프랭크 시내트러와 딘 마틴 등 당대 최고의 스타 군단이 총출동했다.

가이 피어스 주연의 2002년작 '타임머신' 역시 오리지널은 조지 팔의 60년작 '타임머신'이다. 원작은 H G 웰즈의 소설이지만.

당대 최고의 SF 팬터지 감독이었던 조지 팔은 그 어떤 최신의 특수효과로도 따를 수 없는 놀라운 상상력과 독창적인 기술로 시간여행의 흥분을 전한다. 조지 팔의 '타임머신'은 40년 전의 작품이지만 깨끗하게 복원된 화질과 5.1사운드가 남다르다.

대부분의 리메이크는 원작을 뛰어넘지 못하고 오마주(경의)를 바치는데 머무는 경우가 많다. 특히 히치콕의 '사이코'처럼 원작의 영광이 크면 클수록 말이다. 하지만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수십 년의 터울로 만들어진 오리지널과 리메이크 사이에 놓인 간격을 단숨에 넘어 한 자리에 불러모으는 DVD는 진정 영화의 타임머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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