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끔은 '연어'가 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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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며칠 전 나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학생들에게 '우리 가끔은 연어가 되자'라는 요상스런 제목의 강연을 했다. 만사가 경박하게 돌아가는 포스트모던 세태에도 때때로 '근원'을 생각하기 바란다는 주문이었다. 학문과 인생에 이어 민족 얘기를 하다가 터키 역사를 꺼냈다. 1922년 술탄 군주제를 폐지한 터키 의회는 이듬해 무스타파 케말 장군을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의 꿈은 왕년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광을 되찾는 것이었고, 그 길은 서구를 배우고 따라가는 것이었다. 거기 방해가 되는 것은 가차없이 버렸다.

먼저 정교 분리를 단행했다. 혹시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국교 폐지를 선언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상상해보라. 국민의 99%가 이슬람교도인 나라에서 회교력 대신 서양 책력을 채택하고, 이슬람교의 안식일 금요일 대신에 일요일을 휴일로 정했다. 고유의 문자를 버리고 서구의 알파벳을 썼는데, 여기는 아랍어로 기록된 이슬람 경전을 못 읽게 하려는 저의도 한 줌 깔려 있었다. 전래의 원통형 모자 대신 테 달린 모자를 쓰도록 했으니, 이것으로는 이슬람 의식대로 이마를 땅에 대고 기도하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알라신의 눈으로는 '악의 싹'이라도 그렇게 못된 싹이 없겠으나, 청년 장교단의 서구화 달성 열의를 등에 업고 버텼다. 아랍 냄새가 심한 자신의 이름조차 케말 아타튀르크로 고쳤다. 그가 죽은 돌마바흐체 궁전의 1백56개 시계는 일제히 그가 죽은 오전 9시5분에 멈춰져 있으며, 해마다 11월 10일 이 시각이면 터키인은 변함없이 국부에게 묵념을 올린다.

서양을 닮으라는 케말의 유지(遺志)는 유럽연합(EU) 가입 열망으로 나타난다. 이 꿈만 성취하면 서구의 일원으로 떳떳하게 대접받으리라는 '엉뚱한' 소신 때문이었다. 이 희망을 향해 터키는 정말 눈물겨운 노력과 희생을 쏟았다. 나토 가맹으로 인근 사회주의 국가들을 적으로 돌리는가 하면, 걸프전에서는 '형제국' 이라크를 공격하는 다국적 군대에 기지를 빌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말짱 헛일이란다. 화제의 저서 『문명 충돌』에서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그야말로 그의 손에 장을 지지라는 정도의 확신으로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은 턱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유럽연합은 누가 무어래도 백인과 기독교도의 모임인데, 터키가 아무리 분칠을 해도 하얀 얼굴이 되지 않고, 아무리 향수를 뿌려도 이슬람 체취가 가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허, 저런 저런! 그러고 보니 1987년의 터키보다 가입 신청이 늦었던 핀란드·스웨덴·오스트리아는 벌써 회원국이 됐다.

독립 국가를 갖지 못한 세계 최대의 민족이 쿠르드족이다. 터키 인구의 8%를 차지하는 이들의 비원은 단연 터키로부터의 분리와 독립이다. 해외에서 무장 투쟁을 지휘하던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이 1999년 2월 케냐에서 체포되자 런던·베를린·로마·암스테르담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수만의 쿠르드 난민들이 시위와 유혈 폭동을 일으켰다. 기절초풍한 유럽 국가들이 오잘란 처형만은 피하라고 터키에 부탁했고, 이에 터키 정부는 유럽연합 가입 카드를 내밀었다. 금년 9월 터키 국가안보법원은 오잘란 사형을 종신 징역으로 감형했는데, 이로써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이 성사되는 듯했다. 그래서 헌팅턴 교수의 장담은 감탄할 만하지만, 조만간 손가락에 장을 지지게(?) 생겼다고 의기양양하게 KAIST 강연을 끝낸 것이 지난 9일 저녁이었다.

10일 아침 신문 국제면을 펴든 내가 토한 첫마디는 '이런 제기랄'이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동구권의 체코·폴란드·헝가리, 발틱 연안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작은 섬나라 몰타·키프로스 등 10개국을 2004년 신규 회원국으로 추천했다는 기사 때문이었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2007년 가입을 예고했으나, 터키와는 가입 협상 일정조차 정하지 않았다. 장은 내가 지질 판이다. 터키 정부와 국민은 엄청난 분노와 배신감으로 들끓었지만, 유럽연합은 꿈쩍도 않았다.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반군을 후세인 공격에 끌어들이려는 미국만이 이번 결정이 실망스럽다고 터키에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 종교를 버리고, 문자를 버리고, 전통을 버리고, 형제국에 총부리를 돌리면서까지 서구를 닮고, 배우고, 따르자는 충성에 대한 보답이 정녕 이러했다. 민족이 불온 사상(!)이 돼버린 이 세계화 시대에, 젊은 벗들이여 우리 가끔은 근원을 생각하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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