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통수 맞은 햇볕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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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한이 이달 초 방북했던 미 정부 특사에게 핵 개발 계획을 추진 중임을 '시인'했다. 어째서 이런 시인이 가능했을까. 두개의 유추가 가능하다. 하나는 북한이 은밀히 숨겨 추진했던 계획이 미국의 정보망에 걸려 꼼짝없이 시인했을 가능성이다. 또 하나는 미국과의 관계를 풀기 위한 마지막 숨겨둔 카드로 일괄 타결을 위한 정략적 시인이라고도 볼 수 있는 관점이다. 아직은 그 어느 쪽임을 단정하지 못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북한이 대남 유화전술을 펴면서 안으로는 핵 개발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는 사실이 우리를 분노케 한다. 또 핵 개발 자체가 무엇보다 우리의 안위에 직접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라는 점에서 북한 핵 문제는 이젠 더 이상 미국이나 국제 핵사찰 기구에만 맡길 수 없는 우리 안보의 문제가 돼 버렸다.

북한은 지난달 평양 북·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는 등 한껏 생색내는 약속을 했지만 한국인 납치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어 우리를 분노케 한 바 있다. 이번엔 한민족 모두를 위협하는 핵 개발 계획조차 숨겨오다 사실 자체를 인정한 것은 '화해와 협력'의 실질적 동반자인 한국을 철저히 무시한 행태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북한의 핵 개발 계획 시인에도 불구하고 북측이 일괄 타결이라는 방식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풀어가려는 대화 의지의 표현일 수 있다는 식의 안이한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미국 정부는 사태를 평화적으로 풀어가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히고 있으나 북한 핵 의혹에 대한 철저한 검증 없이는 북측 기대에 쉽게 응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결국 미국은 눈앞에 닥친 이라크 공격 문제, 알 카에다와의 반테러 전쟁을 감안해 시간을 벌면서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엄중한 처리에 나설 것이다.

북한이 1994년 제네바 핵동결 합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위반한 사실이 드러난 만큼 북한핵 문제에 대한 비상한 경각심을 가지고 대북 핵 관련 정보를 미국과 공유하면서 북핵 추진의 실체파악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북핵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미국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생존의 문제로 닥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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