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硏 제 역할 하려면 이공계 대학과 통합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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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6면

1966년 한국 최초의 정부출연 연구소인 KIST가 설립되었다. 산업화 초기 단계에 기술개발과 역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으로 선진기술을 토착화시킨 것이 바로 출연연구소였다. 국내 대학의 연구 역량을 자극하여 연구수준을 크게 향상시킨 것 또한 출연연구소의 업적이다. 당시 KIST는 한국 최고의 과학기술 엘리트 집단이었으며 명실공히 국가 발전을 선도하는 한국 과학기술의 산실이었다.

그후 출연연구소는 분소와 신설을 거듭하여 기초·공공·산업의 3개 기술연구회에 소속된 연구소만 19개로 양적으로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90년대에 이르러 국가 경제규모가 급격히 확대되고 산업기술이 고도화하면서 민간기업의 연구소가 대폭 확충되고 이공계 대학의 연구 역량도 선진국 수준에 근접하게 되었다. 이제 출연연구소는 산업화 연구는 기업연구소에 뒤지고 기초연구는 이공계 대학에 못 미치는 샌드위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는 출연연구소 연구원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보장이 대학교수에 비해 뒤떨어지고, 보수는 기업연구소에 비해 낮아 출연연구소의 우수 연구원이 상당수 이직하는가 하면 젊고 유능한 신임 연구원을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행정사무직과 연구보조직의 비대와 노조문제, 그리고 경영효율성 문제도 출연연구소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연구원의 경력과 경륜이 쌓여감에 따라 이에 걸맞은 임무를 부여할 수 없는 출연연구소의 구조적 경직성 때문이다.

첨단 과학기술분야의 연구성과는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50대를 기점으로 하락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생리적인 현상이다.

대학은 원로 교수의 연구 경력과 업적을 교육에 활용할 수 있고 기업연구소는 경륜이 쌓인 중진 연구원을 산업응용이나 실무로 보직을 순환시킬 수 있다.

그러나 출연연구소의 연구원은 은퇴 때까지 연구만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시장원리에 따라 출연연구소를 경쟁시켜 연구성과를 높이겠다는 프로젝트기반시스템(PBS)제도나 정부 각 부처에 소속되어 있던 출연연구소를 총리실로 소속을 일원화하는 등의 조치가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도 바로 이러한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술수명이 짧아지고 첨단 기술이 고속도로 발전해 가는 21세기 지식기반 사회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3만달러의 기술선진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출연연구소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하여야 할 때다.

현재 19개 이공계 출연연구소는 국가 과학기술 예산의 30%인 1조3천억원을 사용하지만 우리나라 과학기술인력의 3%에 불과한 4천7백명의 연구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전체 연구비의 11%를 사용하는 대학은 박사급 연구 인력의 76%를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설문조사에 의하면 출연연구소 연구원의 64%가 대학으로 이직을 희망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답은 하나다. 출연연구소와 이공계 대학의 합병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젊고 유능한 과학기술자들은 충분한 예산과 시설을 이용하여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중진 원로 과학기술자들은 그동안 누적된 풍부한 연구실적과 경험을 토대로 정말 훌륭한 교육을 할 수 있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부출연 연구소는 물론 이공계 대학까지 포함한 대한민국 과학기술계의 연구 및 교육 역량을 동시에 극대화 할 수 있는 윈-윈(Win-Win)전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정부는 강제적이고 획일적인 합병이 아니라 출연연구소와 대학이 자율적인 합의에 의해 합병을 위한 협상에 임하도록 인내와 끈기를 갖고 기다리는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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