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 회복 '암초'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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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세계 주요 국가들이 재정적자로 몸살을 앓고 있다. 경기 불황으로 세수(稅收)는 줄었는데 경기부양과 전쟁·홍수피해 복구 등 써야 할 곳은 많다. 재정적자가 계속되면 불황 속에서도 경기부양이 어려운 것은 물론 금리와 물가가 올라 경제는 큰 시련을 겪게 된다. 몇몇 나라는 적자폭이 워낙 커 세계 경제의 회복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미국, 이라크 전쟁에만 2천억달러

회계연도(2000년 10월∼2001년 9월)가 테러 직후 끝난 덕분에 지난해 미국의 재정은 간신히 흑자를 기록했다.

그런데 테러 직후부터 재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재정을 투입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9월까지의 올 회계연도는 국내총생산(GDP)대비 1.5% 정도의 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돈 쓸 곳은 여전히 많다. 예고한 대로 이라크와 전쟁을 하면 얼추 2천억달러가 필요한데 이는 GDP의 2%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더구나 집권 공화당은 감세(減稅)정책을 주장하고 있어 재정적자는 더 커지게 생겼다. 경상수지 적자도 급격히 늘고 있어 80년대의 '쌍둥이 적자'상황이 다시 나타날 조짐이다.

◇일본 재정적자, 세계 공황 유발설

선진국 중 재정적자가 가장 심각한 나라는 일본으로 지난해 적자가 GDP 대비 8.5%나 됐다.게다가 국가채무는 2001년 말 현재 6백66조엔(GDP 대비 1백30%)에 이른다. 경기를 살리겠다며 재정을 투입했다가 실패해 빚만 남은 결과다. 일부에선 남미식 경제 파탄을 걱정할 정도다.

그럼에도 국가부채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새로 취임한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금융·경제재정상은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정리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경기를 회복시키기 위한 감세정책도 추진 중이다.

◇유럽연합(EU)국가도 힘들어

독일·프랑스 등 EU 주요 회원국의 재정적자가 쌓여 EU에선 '출범 이후 최대 위기'라는 말도 나온다. 유로화 가치와 금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2004년까지 각국의 재정적자를 GDP 대비 3% 이내로 묶는다는 안정·성장협약이 깨질 형편이다.

전문가들이 예상하는 독일의 올해 재정적자는 GDP 대비 3.5%. 하지만 여기에는 2차대전 이후 최악인 홍수피해 복구비가 빠져 있다. 독일의 홍수피해액은 1백50억유로로 추산된다. 프랑스의 재정적자도 예상(GDP 대비 1.4%)보다 큰 2.6%에 이를 것으로 관측된다. 포르투갈과 이탈리아도 적자 규모가 협약 기준을 초과했다. 주요 국가의 재정적자는 EU 통합에도 영향을 미칠 판이다. 회원국으로서 내년 유로 가입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할 예정인 영국과 스웨덴·덴마크 등이 유로화 가치 불안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 통계 의심받는 중국

중국은 아시아 통화위기 이후 적자가 늘었다. 올해는 GDP 대비 3% 수준의 적자를 낼 것으로 보는데, 중국 정부는 경제가 성장 기조라서 문제가 없다는 시각이다.

하지만 나라 밖에선 달리 본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통계에 문제가 있다며 2000년 적자를 GDP 대비 10%로 본다. 이 계산법에 따르면 국가부채도 GDP 대비 1백39%로 커진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박정동 연구위원은 "사회주의 국가의 통계는 신뢰도가 떨어진다"며 "대규모 내수부양 정책으로 막대한 예산을 쓰고 있어 재정수지의 악화가 우려된다"고 진단했다.

성장세가 이어지는 한국의 재정적자는 별 문제가 아니라지만 대만이나 홍콩의 재정적자는 아시아 경제발전의 장애요인으로 지적된다. 남미의 재정적자도 세계경제에 짐이다.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정책으로 정부가 매해 큰 빚을 지면서 외채가 불어나고 통화를 발행하는 과정이 반복돼 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나라마다 시끄러운 재정정책 논쟁

미국 공화당 정부는 아직 여유가 있어 감세정책 및 이라크와의 전쟁을 동시에 실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적잖은 전문가들은 재정적자가 커질 것을 우려한다. 최근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이사장은 "재정적자를 통제하는 데 실패하면 이자율 상승으로 이어져 미래의 경제성장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도 예외가 아니다. 로마노 프로디 EU 집행위원장은 "2004년 재정균형 목표가 달성되기 힘든 상황"이라며 목표연도를 2년 늦출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아예 재정에 대한 제한을 없애자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감세나 금융권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에 대한 반대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남미에선 긴축재정을 요구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삼성경제연구소 홍순영 경제동향실장은 "재정의 역할은 점점 더 커지는데 한번 적자로 바뀌면 되돌리기 어려운 속성 때문에 감시의 눈길이 날카롭다"고 말했다.

이재광 경제연구소 기자

im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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