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고기'에 일자리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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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몇해 전 세간의 화제를 몰고 온 『가시고기』라는 소설의 주인공은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불치병에 걸린 아들을 간호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아버지의 헌신적 사랑 앞에 독자들은 진한 감동과 함께 부성애의 위대함을 돌이켜보게 된다. 이 소설이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실상을 잘 그려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40∼50대, 이들은 누구인가. 청춘을 바쳐 한 회사를 위해 봉사해 오면서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룩한 주역들이다. 희생정신과 책임감이 강해 고생은 자기 세대에서 그쳐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자식들에게 좋은 여건을 물려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왔다.

이들이 젊었을 때 범국민운동으로 발전한 새마을운동은 이들의 근로의욕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국가 차원에서 주인의식을 강조하고 경쟁적으로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던 환경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우리의 40∼50대 아버지들은 휴가도 반납하고 야근을 밥먹듯 해 왔다. 우리나라의 근로시간이 길어지게 된 것은 이런 의식과 근로관행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40∼50대 아버지들의 위상은 초라하다 못해 가련하다. 국제통화기금(IMF)사태 이후 평생직장의 신화가 붕괴되면서 명예퇴직의 주된 대상이 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기 퇴출은 개인의 부주의나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제도가 미비돼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라는 점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우선 임금제도를 보자. 우리의 연공서열형 임금제도로 인해 20년 이상 근속자의 경우 인건비가 신입사원의 2배 이상에 달한다. 즉, 장기근속자 한 사람을 해고하면 신입사원 2∼2.5명을 채용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고용조정이 필요할 경우 숙련 축적에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대상을 장기근속자 위주로 할 수밖에 없다. 동일한 업무를 해도 근속연수에 따라 2배 이상의 임금 차이가 있다면 당연히 신기술로 무장하고 의욕도 넘치는 젊은 층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제도 개선이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근로기준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경영계의 목소리에 대해 외면으로 일관하고 있다. 근로시간단축 정부 입법안을 봐도 마찬가지다.

장시간 근로를 줄이기 위해서는 잔업을 줄여야 하지만 현행과 같은 50%의 높은 임금 할증률로는 잔업을 줄일 수 없다. 우리의 40∼50대 아버지들은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어 할증률이 높으면 휴식보다는 연장근로를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임금 할증률을 조정하지 않으면 실근로시간 단축은 고사하고 인건비가 늘어나 기업경쟁력만 저하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근속연수에 따라 휴가를 가산해 주는 제도 역시 진정으로 장기근속자를 위한 것인지도 한번 고려해 볼 일이다. 단지 오래 근무했다고 해서 임금도 많고 휴가일수도 많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이번에 근로시간제도를 개선하지 않으면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두번 다시 오기 어렵다. 문제는 근로기준법은 근로조건의 최저선을 규정하는 법률이라는 점이다. 법정 최저기준을 지나치게 높여 놓으면 형편이 닿는 기업들은 문제가 덜하겠지만 그럴 형편이 안되는 기업은 문을 닫으라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최근 맞벌이가 많아졌으나 우리나라는 유교적 가치관의 영향으로 가족의 생계를 가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15세 이상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1.8%로서 미국·영국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선진국에 비해서는 20%포인트 가까이 낮다.

따라서 제도 개선을 등한시함으로써 장기 근속한 40∼50대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일자리를 결과적으로 위태롭게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안정을 크게 저해하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이다, 삶의 질 향상이다 하는 거창한 구호도 좋지만 당장 우리 사회의 중추가 되는 40∼50대 근로자들이 실질적으로 고용안정을 기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해소하는 제도개선에 정부가 발벗고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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