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애물단지 된 코스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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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7면

"코스닥요? 그 쪽은 안 쳐다봐요."

한 외국계 증권사 리서치 관계자의 말이다.

비단 전문가들뿐만 아니다. 투자자들과 코스닥 간판기업들도 시장을 외면하고 있다. 10월 들어 코스닥 하루 평균 거래대금은 5천억원으로 줄었다. 거래대금이 최고치를 기록했던 2000년 2월 14일(6조4천억원)의 7.8%에 불과하다.

벤처 붐을 타고 2000년 3월 10일 283.44포인트까지 치솟았던 코스닥지수는 11일 43.67을 기록하며 사상 최저치 행진을 이어갔다. 최고치에서 무려 84%나 떨어졌다.

여기에 주가조작 등 불공정거래사건이 터지면 코스닥 기업들이 예외없이 연루돼 신뢰할 수 없는 시장으로 전락했다

이에 따라 주요 코스닥 기업의 도미노 이탈 조짐도 엿보인다. 코스닥의 대표 정보기술(IT)주인 엔씨소프트는 11일 거래소로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KTF·강원랜드·기업은행 등 코스닥 시가총액 상위기업들도 거래소 이전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이러다간 내년 말까지 문을 닫을 예정인 독일 기술주시장 '노이어 마르크트'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는 극단적인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한국 신경제의 산실(産室)로 주목받던 코스닥시장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투자자 없는 시장=개인 투자자들이 코스닥 주가 폭락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코스닥 매매 비중의 90% 이상이 개인들이기 때문이다.

올 들어 지난 11일까지 코스닥지수는 39% 떨어졌다. 이 기간 중 종합주가지수 하락률(15%)보다 훨씬 크다.

코스닥 주가에 거품이 많았던 1999∼2000년에 투자했던 개인들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다. 개인들로선 주가 폭락으로 투자금이 바닥나 더 이상 코스닥 시장에 남아있기 어려운 상황이다.

기관·외국인의 코스닥 외면 현상은 더욱 심각하다. 현재 외국인·기관의 코스닥시장 매매 비중은 각각 5%도 안된다.

한 투신사 관계자는 "검증되지 않은 쭉정이 기업들이 수두룩한데 뭘 믿고 투자하느냐"며 "투자하는 코스닥기업은 10개 안팎"이라고 말했다.

코스닥 대형기업의 한 관계자는 "외국인 주주들로부터 코스닥에 남아있어 주가가 펀더멘털(기초여건)보다 낮게 평가되는데 왜 거래소로 옮기지 않느냐는 질책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증권사들도 코스닥을 홀대하기는 마찬가지다. 삼성증권의 경우 코스닥 분석 기업이 59개다. 이는 전체 등록종목의 7%에 불과하다.

LG투자증권 박종현 기업분석팀장은 "코스닥기업 대주주들이 언제 '사고(불공정거래)'를 칠지 두렵다"고 말했다.

◇'무더기' 등록,'찔끔' 퇴출=코스닥의 위기는 시장 개설 초기에 검증되지 않은 기업들이 닷컴기업으로 치장한 채 무더기로 들어온 게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또 여전히 돈을 못 벌고, 향후 성장전망도 밝지 않은 기업들이 부지기수다. 올해 상반기에 코스닥기업 가운데 2백33개사(33%), 벤처기업 중 1백41개사(41%)가 적자를 냈다.

지난 8월에는 주가조작이 여의치 않자 기관계좌를 도용하는 희대의 사기극(델타정보통신 주가조작사건)이 벌어지는 등 제도상의 허점을 이용한 불공정거래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올해 퇴출된 기업은 고작 13개에 불과하다. 올들어 코스닥에 등록된 기업은 무려 1백29개사다.심사를 통과해 등록 대기 중인 기업만도 40여개다.

◇어떻게 고쳐야 하나=전문가들은 코스닥 시장을 살리려면 시장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지금까지 투자자 보호를 위해 문제 기업을 퇴출시키는 데 미온적이다보니 시장의 질적 수준이 나빠졌다고 지적한다.

한국증권연구원 엄경식 연구원은 "문제가 있는 등록기업을 과감하게 퇴출시키면 당장은 충격이 크겠지만 투자자들도 점차 투자위험이 큰 기업들을 외면할 것"이라며 "그러면 시장이 자연스럽게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업협회·코스닥위원회·코스닥증권시장으로 나눠져 있는 시장운영체계에 대한 개편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현재 코스닥증권시장은 협회로부터 매매·공시 업무를 위임받고 있고, 코스닥위원회는 등록심사·퇴출 등을 담당한다. 결국 기관 간에 업무가 중복되거나 사각지대로 남아 있는 업무가 생길 소지가 많다.

공모가에 거품을 없애고 인수·합병(M&A)시장을 활성화하는 일도 시급한 과제다.

삼성증권 유시왕 고문은 "등록기업들의 공모가가 너무 높아 등록 직후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있기 때문에 공모가를 더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대우증권 김병수 연구원은 "인수·합병(M&A)시장이 활성화되면 벤처투자자들이 등록 이전에 이를 통해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며 "그러면 조무래기 기업들의 대량 등록으로 나타나는 공급과잉 현상이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우량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코스닥시장을 우량기업(1부)과 비우량기업(2부)으로 나누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嚴연구원은 "1,2부 제도는 과거 거래소시장에서 실패했다"며 "1·2부를 나누는 기준에 대한 논란이 많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재식 기자

angelh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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