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날리는 깃발을 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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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문 앞에 높이 달려있는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보고 두 스님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면서 서로 물러설 줄을 몰랐다. 그 옆을 지나던 선종(禪宗)의 6조 혜능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고 하였다.

흔히들 과학은 가장 객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모든 것은 '우리'라는 존재와는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었다. 그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산의 꽃처럼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대상이고'우리'가 화해할 수 없는 객관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객관적인 사물을 탐구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은 그 성격상 객관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철학이나 정치학과 비슷한 정도의 역사를 지니면서도 그들보다 훨씬 더 누적적인 성과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상은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그 근원에서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양자세계의 모든 대상은 관측에 의해 그 행동을 달리한다. 우리가 대상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려고 하면, 확인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대상의 상태는 달라진다. 우리가 대상을 보려고 하면 우리와 대상 사이에 반드시 어떤 상호작용이 형성돼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상은 더 이상 우리와 관계없이 행동하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고, 따라서 객관적일 수만은 없는 존재다.

더 나아가서, 존재의 '있음'과 '없음'이라는 것도 '우리'를 떠나서 설정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의 입장이다. 이 이론에서 '진공'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어떤 에너지 이하의 모든 상태가 하나도 빠짐없이 입자로 꽉 차있는 '충만'의 상태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입자로 가득 찬 충만의 상태를 아무 것도 없는 진공이라고 느낀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항 속에 기포가 있다면 그 공기방울을 볼 수 있지만, 물로 꽉 차 있다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물고기와 같다.

굳이 국어사전이나 철학사전을 뒤지지 않아도, '무' 혹은 '없음'의 일차적 의미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음', 즉 '모든 것의 존재하지 않음'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없음'이란 '모든 것'과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돼 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존재'가 무엇인지는 조금 더 모른다. 그러므로 '존재의 없음'이란 더 더욱 모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결국, 우리는 있음도 모르고 없음도 모르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현대물리학은 이에 대해 의외의 답을 제시한다. '있음과 없음'은 '우리를 떠나 저만치 홀로 서있는 있음과 없음'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설정되는 있음과 없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있음과 없음'이요 '우리가 느끼는 있음과 없음'이므로, '우리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정의되는 있음과 없음'이 아니라 '우리에게 와서 비로소 완성되는 있음과 없음'이다. 그래서 '있음과 없음'은 우리와 한덩어리가 돼야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다.

결국 우리를 떠나서는 깃발의 흔들림도 없고 바람의 움직임도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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