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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역순으로 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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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난해 12월 11일 KBS-2TV가 방영한 정보.오락 프로그램 '스펀지'는 '짖는 개는 레몬 하나면 뚝 그친다'는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었다. 실제로 컹컹 짖어대는 개의 얼굴에 레몬 즙을 분사하니 거짓말처럼 짖기를 멈추고 제자리를 돌며 뭔가 탐색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매우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애견가부터 한여름 개 도둑에게까지 매우 유용할 법한 정보 아닌가.

개는 왜 짖기를 멈추었을까. '스펀지'에 출연한 한 수의사는 '관문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아마 통증의 뇌 전달 과정을 설명하는 '관문 이론(gate theory)'을 지칭한 듯싶다. 1965년 영국의 생리학자 패트릭 월과 로널드 멜잭이 펼친 이론이다. 그 전의 이론은 '뉴런(신경세포)이 고통을 감지해 뇌에 아프다는 신호를 전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월과 멜잭은 통증 신호라고 해서 뇌에 무조건 들어가는 게 아니라 뇌의 '심사'를 거쳐 입장 여부를 허가받는다고 주장했다. 뇌가 상황에 따라 통증 신호를 수정해 받아들이거나 아예 막기도 한다는 것이다. 전쟁터의 부상 군인이 아픈 줄 모르고, 거꾸로 작은 충격에도 큰 고통을 느끼는 사례를 관문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똑같은 자극인데도 역치(値.자극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도 자극의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자연계의 의미심장한 현상을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그동안 쌓인 인연의 종류에 따라 우리는 A라는 사람을 만나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반면 B를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앞서면서 입이 헤벌어지는 경험을 한다. A에게는 싫어하는 감정의 역치가 아주 낮고, B에게는 좋아하는 감정의 역치가 낮기 때문이다.

이른바 '주사파'는 북한의 좋은 점을 느끼는 역치가 매우 낮다. 반면 북한 인권에 대한 역치는 대단히 높다(그만큼 둔감하다). 일본에 대해서는 어떨까. 우리 국민은 일본에 대해 대체로 낮은 수준의 역치를 갖고 있는 듯하다. 물론 분야에 따라 다르다. 지난해 본지 여론조사 결과 일본은 '가장 싫어하는 나라'와 '가장 본받아야 할 나라'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일본을 싫어하는 역치와 본받으려는 역치를 둘 다 높여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십수년 전 미국을 처음으로 다녀왔다. 한 달가량의 여행을 통해 내가 교육받은 미국과 실제 미국은 큰 차이가 있다고 느꼈다. 미국의 자연과 사람들을 대해 보니 한국이 '삼천리 금수강산'이고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믿음에도 금이 갔다.

많은 한국인은 일본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을 겪어 본 사람들은 대개 '일본을 잘 모르고 있었다'고 실토한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일본에 당한 과거사와 일본의 경제 발전 사이에 역치가 너무 벌어진다. 반대로 다수 일본인은 한국을 모르는 정도를 넘어 아예 무관심하다. 역치 측정이 어려울 정도다. 이 점에서 한류 붐은 이례적인 돌출 현상에 해당한다.

한국인이 일본을 인식하는 과정은 과거사→이웃나라→외국(선진국)이 보통이다. 순서를 뒤집어 외국→이웃나라→과거사로 하면 어떨까. '일본은 외국이다. 그중에서도 선진국이다. 그런데 바로 곁에 있는 나라더라. 다시 보니 그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는 혹독한 식민지 지배 같은 역사적 앙금이 많더라'는 인식 과정이다. 필자는 일본인도 같은 순서로 한국을 인식하길 바란다. 더 객관적으로 상대를 보기 위해서다. 그래야 이 빠진 톱날처럼 불균등한 양국 사이 감정의 '역치'도 고른 직선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노재현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