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운영 칼럼

'여시구진'을 띄운 뜻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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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공산당은 선진 생산력, 선진 문화와 함께 '광대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 중국 공산당의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주창한 이른바 '3개 대표론'의 핵심이다. 이는 자본가를 공산당에 입당시키기 위한 편법-변칙-인데, 자본가는 전통적인 노농 계급이 아니지만 광대 인민에는 속하기 때문이다. 이런 '홍색 자본가'를 놓고 당내에 이견이 분분하자 장 주석은 여시구진(與時俱進)이라고 일갈했다. 이헌재 경제 부총리가 새해 인사를 겸해 이 말을 재정경제부 직원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때의 변화를 읽고 앞으로 나가자는 당부이겠으나, 내게는 오히려 새해 경제에 던지는 그의 화두처럼 들렸다.

*** 정책 세우는 모든 인사들에 띄워

사실 이 말의 수취인은 재경부 공무원을 넘어 경제 정책 수립에 관여하는 각계 인사들이기 쉽다. 그중에는 청와대 실세도 있고, 386 정치인도 있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스펙트럼에서 여시구진은 분명 진보 쪽에 속하지만, 오늘의 유행 상품인 개혁보다는 오히려 '조정'의 의미가 진하다. 연초에 잠시 이 부총리의 생각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구조 조정에 대한 그의 관심은 아주 집요했다. 외환 위기와 국제통화기금 개입으로 제조업과 금융업은 상당한 조정이 이뤄졌으나, 농업과 서비스는 여전히 사각 지대에 온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시구진의 경제적 과녁은 바로 농업과 서비스 산업의 구조 조정인 셈이다.

지난 연말 가까스로 타결된 쌀 협상만 해도 그렇다. 관세화냐 관세율쿼터(TRQ)에 따른 의무 수입이냐의 득실 계산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10년의 관세화 유예 성적을 돌아보면 앞으로 10년간 관세화 '재유예'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인지 정말 자신이 없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타결된 1995년 정권은 이를 농어촌 발전의 원년으로 삼아 '돌아오는 농촌'을 만들겠다고 손가락에 장이라도 지질 듯이 장담을 했다. 그래서 농어촌 특별세를 거두고 물경 60조원을 쏟아 부었으나 결과는 '도로아미타불'이었다.

국제 쌀값의 160% 정도로 국내 쌀값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당초 계획에 따르면 지금 쌀 한 가마에 20만원 대신 7만원이 돼야 한다. 10년 전에 비해 국제 쌀값은 25%가 내렸는데 국내 쌀값은 도리어 53%나 올랐다. 농민은 재협상 투정이나 부리고, 정부마저 농민의 정서를 따져 농림부 장관을 임명할 만큼 한가한 때가 아니다. 농민의 정서를 농민의 이성과 농촌의 과학으로 바꿀 지혜와 역량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 말자. 새로 100조원을 퍼붓는다니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다가 2015년쯤 어느 운수 사나운 정권한테 이 액운을 떠맡겨버리면 그만 아니겠는가.

그러나 서비스 분야는 그렇게 느긋하지 못하다. 교육.의료.관광 등 고소득층의 국내 소비는 급감하고 해외 소비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올해 상반기에 서비스 산업 장관 회의를 설치하고 도하개발의제(DDA)에 오른 40개 업종의 보호와 규제를 전면 재검토할 예정이다. 그러나 개방이 국내 경쟁력을 자극하는 대신 초토화할 위험도 있다. 개방 압력이 덜한 업종도 한가지다. 예컨대 택시 승객은 계속 주는데 면허는 자꾸 늘어나니 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으며, 요식업계의 솥단지 시위도 기본적으로 인구 70명에 하나꼴인 식당의 과잉 공급에 원인이 있다는 진단이다.

그런데도 출구가 묘연하다. 엘피지(LPG) 세금 몇 푼 깎아주어서 택시 업계를 살리지 못하듯이, 어려워도 지갑을 열라는 소비 유도 호소 역시 마땅한 대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비스 산업 생산성은 일본의 절반 수준인데 취업자 대비 자영업자 비중은 3배나 되는 구조를 가지고는-화끈한 구조 조정 없이는-현재 우리 발목을 잡고 있는 불황 탈출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정신 차리자'는 메시지 담겨

저쪽도 위에서 한마디 하시면 아래서는 용비어천가를 읊조리는 모양이다. 여시구진의 전거가 천지의 차고 빔은 때와 더불어 들고난다(天地盈虛 與時消息)는 '주역'이라느니, 세상과 함께 변한다(與世推移)는 '문선'이라느니 하다가 드디어 '여시구진적 사회주의'까지 나왔다. 나는 여시구진을 띄운 이 부총리의 깊은 뜻을 헤아릴 능력이 없다. 다만 해묵은 사회주의 국가마저 변한 만큼은 받아들이는데 선진 경제를 내거는 우리가 이래서야 어디…. "어이 정신들 차리라고" 이런 메시지가 아닐는지? 새해에는 일마다 소원 성취하시고(事事與時俱進) 부자 되세요(財源與時俱進)!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