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아시안게임>세계新 카자흐 역도 고려인이 1등 공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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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남자역도 77㎏급 경기가 벌어진 4일 카자흐스탄의 세르게이 필리모노프(27)가 인상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자 선수 대기석에서 껑충껑충 뛰며 기뻐하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머리에 갈색 눈. 가슴에 붙은 카자흐스탄 국기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인상의 그는 필리모노프의 코치 나자르 돈(51)이었다. 카레이스키, 즉 고려인인 그는 1985년 필리모노프를 발굴해 지금까지 키워온 카자흐스탄 역도의 숨은 일꾼이다.

카자흐스탄이 소련에서 독립하기 한참 전인 78년 역도를 시작한 돈 코치는 선수 시절엔 슬라브족 출신 선수들의 틈새에서 좀처럼 빛을 볼 수 없었다.

국내 대회에 몇 차례 출전한 게 그가 가진 경력의 전부다. 은퇴 후 체육교사가 된 그는 카자흐스탄 전역을 돌며 역도 유망주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발굴한 선수가 바로 필리모노프다. 벌써 17년째 그를 지도해왔지만, 훈련을 시키는 것보다 도망간 그를 잡아오는 게 더 힘든 일이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4위에 그친 필리모노프는 이후 수시로 역도를 하기 싫다며 도망쳤고, 그럴 때마다 돈 코치는 카자흐스탄 곳곳을 뒤져 그를 찾아내 다시 바벨을 잡게 했다. 4일 금메달을 목에 건 필리모노프는 "세계기록을 세웠지만 그래도 이젠 그만두고 싶다"고 하자 돈 코치는 "2004년 아테네에서 금메달을 따낸 뒤 그만두라"고 타일렀다.

현재 카자흐스탄 역도팀 코칭스태프 네명 가운데 돈 코치를 비롯해 총감독 알렉세이 니(41)와 1백5㎏급 코치인 로냐 지가이(52) 등 세명이 고려인이다. 현지 발음에 맞춰 동(董)씨는 돈(Don)씨로, 이(李)씨는 니(Ni)씨로 쓴다.

이들의 조부모는 1900년대 초 한국 땅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고, 37년 스탈린의 한인들에 대한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옮겨갔다.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 3세인 이들에게 조부모의 고향 한국은 아직까지는 낯선 나라다. 그런데 부산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며 조금씩 '피'가 끌리는 것을 느끼고 있다.

니 감독은 "카자흐스탄에 있을 때는 카레이스키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 모두들 우리더러 한국사람이라며 좀더 잘 대해주려고 애쓴다. 서서히 '내가 한국사람이기도 하구나' 하고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부산=장혜수 기자

hsc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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