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 풀린 권력기관] # 검찰·경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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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검찰의 한 고위간부는 최근 한나라당 국회의원에게서 지역구민이 연루된 사건의 진행 상황을 알아봐달라는 민원 전화를 받았다. 처음엔 완곡히 거절했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연락이 와 개요만 살짝 알려줬다고 한다. 그는 "정권 초기 대부분 민주당 의원만 부탁했는데 요즘은 정당 구분이 없다"고 푸념했다.

정권 향배가 불확실한 마당에 의원들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는 검찰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소한 정보 제공이 잦다 보면 자칫 수사정보 유출로 이어질 수도 있다.

대형사건 수사는 아예 기피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다른 검찰 관계자는 "큰 수사를 하려고 하면 윗분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단발성 사건 외에는 사실상 일손을 놓고 있다"고 말했다."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가 최규선씨에게서 20만달러를 받았다"는 민주당 설훈 의원의 주장을 둘러싼 고소·고발 사건의 경우 검찰은 5개월 동안 수사하고도 "확인할 게 남았다"며 발표를 미루고 있다. 또 '병풍' 수사팀 내부에선 수사 방향을 놓고 적지 않은 의견 차가 벌어지고 있다.

한편 경찰에서는 얼마 전까지 '승진 영순위'였던 청와대 파견이나 정보·특수수사 분야를 피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몇달 전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돼 미국으로 도피한 최성규 전 경찰청 특수수사과장의 후임자를 결정하는 데 무려 한달 반이 걸렸다. 물망에 오른 간부들이 대부분 고사했다는 것이다. 대신 정치적 바람을 덜 타는 보안 분야 등에 희망자가 몰렸다.

한 경찰간부는 "정권 말기 민감한 자리에 가면 정권이 바뀐 뒤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개혁 정책을 수행하는 것은 엄두도 내기 힘든 분위기다. 한 일선 경찰관은 "상부에서 계속 '정보 유출 엄벌한다''정치권에 줄 대지 마라'는 등의 지시가 내려오는데 이는 결국 조직이 몸 사리기에 급급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라고 했다.

한 경찰 고위간부는 "요즘 문제가 생기면 민주당이 아니라 한나라당 인사들을 찾아다니는 간부들이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강수·강주안 기자

pinej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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