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의 법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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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에서 증권시장과 정보기술(IT)의 거품은 이미 무너졌다. 남은 버블은 달러의 가치다."

저명한 경제전문가인 프레드 버그스텐 국제경제연구소장의 말이다. 미국이 10년 이상 장기 호황을 누렸지만 올해 5천억달러에 이를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를 안고 있다. 이론상으로는 미국 돈의 가치가 떨어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미국은 전세계 저축액의 6% 가량을 투자형태로 빨아들여 적자를 메웠고, 그런 과정에서 달러가치에 거품이 인 것이다.

뉴욕 타임스지는 버그스텐을 인용한 기사에 '중력의 법칙'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달러가치도 떨어질 때가 됐다는 뜻이다. 3백37년 전 뉴턴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발견한 만유인력을 발전시킨 중력의 법칙은 불변의 진리로 인정돼왔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오르긴 힘들지만 내리막은 가파르고, 떨어질 이유가 있으면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런 진리를 유독 미국의 경기나 달러가치는 지난 10여년간 외면해온 것이다.

지난주 미국 연방통계국이 발표한 '2001년 빈곤층 및 가계소득 통계'는 이런 중력의 법칙을 실감케 한다. 지난해 미국의 빈곤층은 8년 만에 처음으로 증가했으며 중산층 소득은 1991년 이후 처음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인구의 11.7%에 해당하는 3천2백90만명이 빈곤층으로 집계됐다. 2000년에 비해 0.4%포인트, 1백30만명이 늘어난 것. 물론 가난의 기준은 상대적이다. 지난해에는 물가상승폭을 감안, 4인가족의 경우 연간소득 1만8천1백4달러(약 2천2백만원)미만이 빈곤층으로 분류됐다. 지난해 3월부터 시작된 경기침체가 가난한 미국인들을 늘려 놓았다는 것이 통계 당국의 분석이다.

계층간 격차도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 미국 중산층 가구의 실질소득은 4만2천2백달러(약 5천만원)로 전년보다 2.2% 감소했다. 반면 상위 5% 가구의 연간소득은 26만4백64달러(약 3억1천만원)로 1천달러가 늘었다. 이들의 소득 합계는 전체 가구 소득의 절반을 차지했다. 한해 전에는 45%였다. 이에 비해 최하위 5% 계층의 소득점유율은 3.5%로 0.5%포인트 감소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빈부격차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들어 거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과잉 소득과 호화판 사생활에 미국 여론의 반응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는 것도 이런 흐름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런 중력의 법칙이 미국에만 작용하겠는가. 돈이든 권력이든, 때가 되면 기우는 것을.

손병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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