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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부엌 식탁에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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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호 10면

그 사람은 식구들이 다 잠든 한밤중에 부엌으로 나온다. 부엌 불을 켜고 식탁에 앉는다. 배가 고픈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보통 때의 그는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서 김치와 함께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그는 부엌 식탁의 불빛 아래에 앉아 노트북을 펼친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며칠 전 그는 식당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2학년 때인가 같은 반을 했지만 그다지 친한 편은 아니라서 졸업 후에는 따로 만난 적이 없었다. 30년의 시간이 흘러간 셈인데 그는 뒷모습만 보고도 단박에 동창을 알아본다. “혹시 가야고등학교 나오지 않았어요?”

동창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데 누구시죠?’라는 표정으로 그를 본다. 그는 동창의 기억을 돕기 위해 숱 없는 머리와 수염 난 입 쪽을 두 손으로 가린다.
“이래도 나 모르겠어?” “아, 알겠다. 무슨 일 하냐?”
그는 대답 대신 명함을 건넨다. 동창은 그의 명함을 받아 쓱 보더니 셔츠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동창은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너 시인이 된다고 하지 않았나?” “시인은 뭐 아무나 되나.”
“넌 시인이 될 줄 알았는데.”

그와 동창은 서로의 근황과 아이들 이야기와 각자가 연락하고 지내는 동창들 이야기를 나눈다. ‘조만간 꼭 술 한잔 하자’라는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몇 번이나 한다. 헤어질 때 동창은 또 말한다.
“넌 시인이 되었어야 하는데.”

시인이 되었어야 하지만 시인이 되지 못한 그는 식구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 식탁에 앉아 깜박깜박하는 커서를 바라본다. 어쩌면 그는 어릴 때 글쓰기 시간에 칭찬을 받았을지 모른다. 놀러 간 친구네 집에서 친구의 누나들이 읽던 시집과 소설책을 읽으면서 자신도 나중에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꿈을 꾸었는지 모른다. 중학교 때 교생실습 나온 예쁜 선생님이 추천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그런 꿈이 결심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는 문예반에 들었는지도 모르고, 백일장이나 대학문학상 같은 데서 상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이 동창의 기억 속에 그를 ‘시인이 되었어야 할 녀석’으로 새겨 놓았을 것이다. 사실 동창의 기억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의 마음 깊은 바닥에 꾹꾹 눌러놓은 ‘글 쓰기’에 대한 욕망이다. 그래서 그는 출퇴근 버스 안에서 책을 읽으면서 그 납작한 욕망을 책갈피처럼 만지작거리는 것이다. 오늘도 그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책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인용한 크레이그 토마스의 문장을 읽었다.

“많은 처녀작은 한밤중에 부엌의 식탁에서 써진다.”
그러고는 마치 한밤중 부엌의 식탁에 앉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처녀작을 쓸 수 있을 것처럼 그는 식탁에 앉아있다. 무엇을 쓸까? 적어도 부엌에서 쓰는 글은 밥처럼 든든한 글이어야 할 것이다. 아베 야로의 만화 ‘심야식당’의 마스터가 내놓는 ‘어제의 카레’처럼 위로와 격려가 되는 글.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에 나오는, 오븐에서 막 구워낸 따뜻한 계피롤빵처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런 처녀작을 써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앉아 있어도 처녀작은 쓰이지 않고 어렸을 때 그가 만났던 처녀들만 생각난다.

아내가 오줌 누러 나왔다가 부엌에 있는 그를 보고 묻는다.
“뭐 해? 안 자고.”
그는 글을 쓰는 체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도 처녀를 좀 써 보려고.”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스스로 우유부단하고 뒤끝 있는 성격이라 평한다. 웃음도 눈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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