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문화 밀어줄 든든한 후원 아쉬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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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반도체 집적도가 18개월마다 두 배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으로도 유명한 인텔 공동 설립자 고든 무어는 케임브리지 과학기술도서관 건립에 1천2백50만달러를 기부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측은 고든의 기부가 인류애의 징표라고까지 칭송했다. 어린 시절부터 소문 난 독서광인 빌 게이츠는 미국 공립도서관 기부 사상 최대 액수인 2천만달러를 자신의 고향이자 마이크로소프트 본사가 있는 시애틀의 공립도서관에 기부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철강왕으로 이름난 앤드루 카네기가 있다. 그는 자신의 고향 스코틀랜드 던펌린에 도서관 건물을 기부한 것을 시작으로(1881년), 2천8백여곳의 도서관 설립을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네기는 도서관 건축비를 자신이 부담하고 나머지 모든 사항은 지역사회에 맡긴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오늘날 미국의 대표적인 공립도서관인 뉴욕 공립도서관도 1901년에 카네기가 기부한 5백20만달러가 본격적인 발전의 밑거름이었다.

현재 영국에서 대영도서관 다음으로 규모가 큰 옥스퍼드 보들리언 도서관은 토머스 커브험 주교의 기부로 착공해 1327년에 완공된 교직원회 건물 부속 도서실이 그 전신이다. 16세기 중반 옥스퍼드 대학은 심각한 재정난으로 도서관 없는 대학이 돼 버렸지만, 1598년에 토머스 보들리가 개인 장서를 기증하고 기부금을 내어 공사를 진행한 끝에 1602년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다.

도서관뿐이 아니다. 칼 구스타프 융 저작집을 비롯해 지성사적 가치를 지니는 책을 다수 포함하고 있는 볼링겐 시리즈도 한 사람의 기부자를 필요로 했다. 미국의 대부호로서 문화·예술분야를 적극 후원한 폴 멜론이 1941년에 설립한 볼링겐 재단이 시리즈의 발행 주체였던 것이다. 1969년 재단측은 고고학·민속학·문학·비평·신화학·철학·심리학·종교학 분야의 책을 계속 출간한다는 약속을 받고 볼링겐 시리즈를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 넘겼다.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1912년부터 출간하기 시작한 로브 고전총서(Loeb Classical Library)도 제임스 로브라는 인물이 아니었으면 나올 수 없었다. 현재 5백여권 가까이 출간돼 있는 이 총서의 모든 책에는 희랍어 또는 라틴어 원문과 영역문이 함께 실려 있다. 고전학에 조예가 깊었던 제임스 로브는 총서를 직접 기획하고 출간 기금을 기부한 것 외에도 하버드 대학 고전학과, 보스턴 미술관, 미국 고고학원, 미국 음악예술원 등에 기부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거액의 재산을 불우이웃 돕기나 모교 발전을 위해 기부한 이들의 미담이 큰 화제가 됐다. 기부문화 정착의 필요성을 말하는 사람들도 전에 없이 많아졌다. 소중한 뜻이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독서인의 입장에서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아직까지 도서관이나 책 및 독서문화 발전을 위한 기부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업이 문화예술 분야를 후원하는 메세나 활동에서도 출판·책·독서문화 발전을 위한 지원은 찾아보기 힘들다. 문화정책개발원의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기업메세나 활동은 공연 예술·축제·행사 등에 대한 후원이 주를 이룬다. 물론 그런 분야에 대한 후원은 중요하다. 더구나 기업 입장에서는 공연예술이나 축제·행사 등을 후원하는 것이 기업 이미지 제고 측면에서 효과가 크다고 판단할 법하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용을 거두려 하는 것이 합리적인 인간이라고 한다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출판·책·독서문화 발전을 위한 기부야말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용을 거둘 수 있다. 제한된 관객들을 대상으로 일정 기간 안에 끝나는 공연행사에 비해 책은 오랜 세월에 걸쳐 보다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기부는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 전반의 지적 역량을 향상시킴으로써 기업 경쟁력, 국가 경쟁력 제고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기도 하다. 기존의 메세나 활동이 출판·책·독서문화 부문까지 포함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들다면 차제에 북 메세나(Book Mecenat) 개념을 도입하여 제도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자는 제언을 하고 싶다.

출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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