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뜬 딸 대신해 장학금 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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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지난 15일 오전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한국산업기술대학교에 한 중년남성이 찾아왔다. 건축가 김운기(52·경기도 안양시·사진)씨였다. 김씨는 한국 최초의 국어교과서인 ‘국민 소학 독본’부터 최근 발간된 교과서까지 국어책만 2000여 권을 수집해 지난해 전시회를 열어 지역사회에선 유명 인사다.

그는 이날 대학 측에 “이 학교 2학년 재학중 세상을 떠난 딸이 생전에 받았던 세 학기 분 장학금 200만원에다 살았으면 다녔을 나머지 다섯 학기 분 등록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학교에 장학금으로 내놓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최근 출간한 자신의 시집 『49일』의 인세도 전액 기증하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장학금 기부는 먼저 간 사람을 위해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배려라고 생각한다”며 “내가 먼저 갔으면 내 딸도 유산으로 남을 돕기 위한 기부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의 딸 서혜(20)씨는 지난 5월 우울증으로 세상을 등졌다. 항상 밝고 애교가 많았던 막내딸이었기에 김씨는 처음엔 도저히 이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괴로움에 술을 마시려고 하면 딸이 해줬던 달걀말이가 생각났다. 전화벨 소리가 울릴 때마다 ‘지금 가요’라는 딸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김씨는 장례식 날부터 49재 막재까지 딸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절절하게 기록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시집 『49일』이다. 김씨의 시집은 출간 한 달 만에 2쇄를 찍을 정도도 대중의 호응을 얻고 있다. 김씨는“딸을 생각하며 쓴 시를 모은 시집인 만큼 그 인세를 딸의 학교에 기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서혜씨는 지난해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산업디자인공학과에 입학한 뒤 세 학기를 다니면서 한 번도 성적우수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을 정도로 우등생이었다. 적극적인 성격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다. 장례식 때는 1000명이 넘는 친구가 찾아왔을 정도다.

김씨는 “내 자식만 소중하고 예쁜 줄 알았는데 지금은 살아있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고맙다”라며 “먼저 간 딸이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로 뜨게 해 준 만큼 앞으로 출간하는 다른 책의 인세도 장학금 등으로 기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산업기술대 최준영 총장은 “기부받은 장학금을 생전에 서혜 학생처럼 학교생활에 적극적이고 학업에 정진하는 학생을 위해 값지게 쓰겠다”고 밝혔다.

시흥·안양=최모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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