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검으로 돌아온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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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철원(당시 13세)군 등 5명의 어린이들이 와룡산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며 집을 나선 것은 1991년 3월 26일.

'개구리 소년들'이 이날 와룡산에 오르기 전 인근 마을에 사는 학교 친구와 주민들에게 모습을 보인 것을 마지막으로 11년이 넘도록 어디에서도 이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26일 유골 발굴 현장에 도착한 소년들의 부모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듯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사건 직후 연인원 30여만 명의 경찰력이 동원돼 와룡산 일대를 뒤졌는데도 시신들이 발견되지 않았던 점 등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게 됐다. 유골의 정확한 신원은 DNA 검사가 끝나야 최종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발견 현장=유골이 발견된 와룡산 중턱 성산고교 신축 공사장 옆 골짜기는 개구리 소년들의 집으로부터 3.5㎞ 가량 떨어진 곳이다.

두개골과 앙상한 뼈가 발견된 현장 주변에는 어린이용 신발 5켤레, 해진 겨울 내의, 탈색된 청색 운동복 등 10여 점이 함께 나왔다. 유골 1구에는 당시 조호연(12)군이 보철을 했던 것과 같은 형태의 보철 흔적도 있었다.

유골은 작은 골짜기에 있는 깊이 30㎝ 가량의 웅덩이에 한데 엉켜 있었던 점으로 미뤄 당시 추운 날씨에 아이들이 서로 엉겨 붙은 채 체온이 떨어져 숨진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이들이 산을 헤맬 당시에는 비(당일 강우량 5.7㎜)가 왔고, 기온은 최저 3.3도, 최고 12.3도를 기록했다. 산속이란 점을 감안하면 영하로 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달서경찰서 김용판(金用判)경찰서장은 "발견된 두개골 등에서 외상의 흔적이 없어 타살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실종 사건=91년 3월 대구 성서초등학교 어린이 실종 사건이 발생한 뒤 현재까지 11년6개월 동안 경찰은 국내 단일 실종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의 수사 인력을 투입했다.

이 사건과 관련, 91년 3백25건의 신고가 접수됐으나 모두 허위로 종결됐고 92년 97건, 93년 1백31건의 제보가 잇따르는 등 현재까지 모두 5백74건의 제보가 접수됐다. '개구리 소년들'을 목격했다는 제보 전화, "내가 금품을 목적으로 납치했는데 영양 실조로 죽어가고 있다"는 등의 범인을 자처하는 전화·편지가 잇따라 수사에 혼선을 빚기도 했다.

경찰은 그동안 연인원 32만1천여 명을 동원해 가출·납치·탈진 등으로 인한 아사나 익사 등 다양한 방향으로 나눠 이들 소년의 행적을 추적해 왔다.

경찰은 안전사고 여부를 수사하기 위해 5백25차례에 걸쳐 7만1천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산악수색을 벌였고, 저수지·강변에 98차례, 대형 화장실 등에 21차례 등 모두 6백67차례에 걸쳐 광범위한 수색작업을 했다.

또 전국 1천56개소의 복지시설과 종교단체, 13만9천여개소의 가내공업사 등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였다.

이와 함께 경찰은 달서구 이곡동과 용산동 일대 13개동 1만1천여가구에 대해 특별 호구조사를 벌이는 한편 소매치기범과 속칭 앵벌이 3천8백여명, 전과자·우범자 9백90여명, 성서초등학교 졸업생 2천여명, 성서공단 종업원 2만여명 등에 대해서도 조사했으나 허사였다.

지난 11년간 개구리 소년들의 사진이 게재된 8백10만여장의 전단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배포됐고 이들의 실종을 소재로 한 영화와 가요·추리소설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11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김종식군의 아버지 김철규(49)씨가 아들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 간암을 얻어 지난해 10월 숨지는 등 5명의 어린이 가족들 모두 후유증에 시달려 왔다.

◇실종자=우철원(당시 13세·성서초등 6년)·조호연(12세·5년)·김영규(11세·4년)·박찬인(10세·3년)·김종식(9세·3년)

대구=홍권삼·황선윤 기자

suyo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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