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달라져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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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인구 10만 안팎의 소도시 데이턴시에서 발행되고 있는 '데이턴 데일리 뉴스'지는 1991년에 지난 20년간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산업재해자료 1백80만건을 분석한 결과를 특집기사로 연재한 바 있다.

여기서 매년 6만여명이 산업안전사고로 사망했으며, 20년간 산업안전법 위반으로 감옥에 간 사업주는 단 한명뿐이라는 것, 한 화학공장에서 안전사고로 22명이 사망한 사고조차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졌다. 당연히 이 기사는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5t 트럭 한대 분량의 자료는 보건부의 데이터베이스를 온라인으로 검색해 분석됐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 기사가 햇빛을 보기까지 기자와 신문사가 기울인 끈질긴 노력이다.

기자가 이 기사를 쓰기로 결심한 것은 1989년. 기자는 당시 연방정부 보건부에 자료의 공개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렇지만 기자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신문사의 도움을 받아 곧바로 자료 공개를 요청하는 법정투쟁에 들어갔다. 그러나 1,2심에서 모두 패소하고 말았다. 신문사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의회와 신문발행인협회를 통해 직접 백악관에 자료 공개를 청원했다.

이렇게 해서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되기까지 꼬박 2년이 걸렸다.

지방의 한 작은 신문이 10여 년 전에 해낸 이 사례는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진실을 밝혀내려는 언론의 투철한 직업정신과 사명감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언론이 마땅히 행해야 할 직분이며 바른 길이다. 이 시대의 자유롭고 책임 있는 언론은 모두 이 같은 본분에 충실하다.

필자는 매년 국정감사 때면 우리나라 언론의 실종된 본분을 재확인하게 된다. 의원들에게 제출된 국감자료를 통해서야 겨우 몰랐던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전국에 무보험차량 60만대가 거리를 질주하고 그에 따른 피해보상문제가 심각하다는 것, 조기유학이 매년 두배씩 늘고 대다수가 불법이라는 사실 등이 국감자료를 통해서야 겨우 알려진다. 이렇게 국감자료를 통해 드러나는 일들의 대부분은 이미 언론이 밝혀냈어야 마땅할 사실들이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언론은 그렇게 못해왔다. 많은 경우 언론은 본분을 망각한 채 안일함에 안주하고 있다. 취재원이 제공한 자료에 주로 의존해 보도하는 이른바 발표 저널리즘에 너무나 익숙한 관행이 언론의 그러한 모습을 잘 드러내 준다. 기자 자신이 취재를 통해 발굴한 사실이 아닌 취재원이 제공한 보도자료나 말의 검증을 소홀히 한 채 기사화함에 따라 초래될 현실 왜곡과 여론 오도의 위험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앞에서 예를 든 탐사보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실을 검증하는 언론의 기본원칙만은 지켜야 한다. "누가…라고 말했다"라는 식으로 인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기자가 사실을 제대로 밝혔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기사 쓰기는 객관주의 언론의 본령이 아니다. 검증 안된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 검증의 대상일 뿐이다.

'사실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게 하라'는 객관주의 언론의 진수는 검증된 사실만을 '사실'로서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기자는 사실의 광맥에서 검증을 거쳐 진실을 캐내는 광부와 같다.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나열할 때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이미 16대 대선 보도에서 발표 저널리즘에 익숙한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정치기사가 부실한 탓은 물론 현실정치의 난맥상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론이 추악한 정쟁의 충실한 전달자일 수는 없다. 비열한 정쟁을 위한 정쟁은 보도하지 말고 비판하자. 정쟁 보도가 정쟁을 부추기는 측면도 고려하자. 후보의 공약을 나열만 할 것이 아니라 실현 가능성을 검증하자. 그럼으로써 이번 대선에서 언론의 본분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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