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솥 천하평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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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4면

1980년대 초 일본을 다녀온 주부들의 손에는 으레 일본 조지루시사의 코끼리표 전기 밥솥이 들려 있었다.세관에 죽 늘어선 주부들의 사진이 언론에 실리며 '밥솥 하나도 제대로 못만들어 나라 망신을 시키나'라는 자조(自嘲)가 일었다. 오죽했으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관련 부처 장관들을 모아놓고 '당장 대책을 마련하라'고 호통을 쳐 정부 산하 연구소와 민간기업이 난데없는 밥솥 개발에 매달렸을까.

그런 우여곡절을 겪었던 한국의 전기 밥솥이 이제 일본에 수출된다.주인공은 '쿠쿠 밥솥'으로 잘 알려진 국내 전기밥솥의 1인자 성광전자.

사실 성광전자의 밥솥은 이미 지난해 3월부터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으로 마쓰시타에 납품되고 있다. 하지만 당당히 자사 브랜드를 달고 수출하는 것은 처음이다.

구자신(61·사진)사장은 "전기밥솥이 간단한 제품인 것 같지만, 그동안 마쓰시타·도시바·미쓰비시 등 일본 전자 회사가 갖고 있는 특허의 벽에 걸려 자체 브랜드 수출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실시된 성능검사에선 일본 제품보다 나은 것으로 평가 받았다.

쿠쿠의 성공은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과감한 마케팅의 결과다. 생산제품 대부분을 대기업에 OEM으로 납품하던 쿠쿠는 98년 외환위기를 맞아 주문량이 반 이하로 떨어지자 자체 브랜드 쿠쿠를 들고 시장에 나왔다.

"영업사원에게 판매점에 물건을 주고 그 자리에서 현금을 받아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처음 두달간 단 한개도 팔지 못했죠."

그러나 구 사장은 실망하지 않았다. "너네 제품엔 금테 둘렀냐"란 핀잔 속에서도 판매점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린 영업사원의 노력으로 쿠쿠 밥솥은 한 두 개씩 진열대에 올랐다.그 제품이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자 구 사장은 이번엔 과감한 광고 전략을 폈다. 한달에 2억원을 들여 황금시간대만 골라 TV광고를 했다.그만큼 품질에 자신이 있었다.

OEM납품 시절 개발해놓고도 '혹시 폭발할지도 모른다'며 대기업이 출시에 반대하던 압력전기밥솥을 과감히 자체 브랜드로 내놓은 것도 시장의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양산 공장의 3층에 있는 기술연구소에서는 언제나 밥 짓는 냄새가 가득하다. 이 회사에서 실험에 사용되는 쌀은 하루 20㎏. 전체직원의 15%에 달하는 40명의 연구원들은 밥이 만들어지는 공정을 세밀히 분석해 '맛있는 밥'을 짓기 위한 노하우를 연구한다. 연구비는 전체 매출액의 7%선.

밥이 눌어 붙지 않는 테프론 코팅 기술을 세계에서 두번째로 개발한 것도 이같은 연구개발 노력의 소산이다.

쿠쿠밥솥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50%선. 내로라하는 대기업들도 쿠쿠의 위력 앞에선 맥을 못춘다. 성광전자는 지금도 연 1백억원 가까운 돈을 광고에 쏟아 부으며 브랜드 관리에 나서고 있다. 고려대 재학 시절 총학생회장을 했던 구자신 사장은 졸업 후 쌍용에서 10년간 김성곤 회장 비서로 일하다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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