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기'式 낡은 관행 단타매매 부추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1면

최근 시황 분석가가 주가 조작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된 것을 계기로 현행 증권사의 유망종목 추천 방식이 온당한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검찰 조사 결과 D증권사의 시황 분석가인 鄭모씨가 지난해 4월 25일부터 5월 13일까지 자사가 발행하는 '데일리(일일 시황지)'에 하이퍼정보통신을 투자 유망 종목에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주가 조작에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제는 鄭씨가 특정 산업·기업에 대해 분석하는 이른바 애널리스트(기업 분석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전체 증시의 흐름을 진단하고 전망하는 '스트래터지스트(Strategist·투자 전략가)'다. 통상 투자 전략가는 애널리스트와 달리 특정 기업의 실적 예상치나 투자 의견·적정 주가 등을 제시하지 않는다. 결국 鄭씨는 기업의 구체적인 내용을 잘 모르면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데일리를 주가 조작 수단으로 악용한 셈이다.

<그래픽 참조>

이에 대해 리캐피탈투자자문 이남우 사장은 "투자 전략가가 추천 종목을 데일리에 제시하는 것은 단기 매매가 판치는 후진국 증시에서나 이뤄지는 관행"이라고 지적했다. 메릴린치 서울지점 이원기 상무는 "미국 등 선진국에선 투자 전략가가 자사 애널리스트가 좋게 보는 종목을 제시하는 경우는 있지만 직접 투자 종목을 골라 제시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종목 추천은 관행"=현재 대부분의 증권사는 데일리를 통해 짧은 기간에 높을 수익률을 낼 것으로 기대되는 종목들을 '투자 유망 종목'이란 이름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일은 주로 투자전략팀에서 담당한다. 대개 증시의 테마와 어울리거나 주가가 단기적으로 크게 오를 수 있는 호재가 있는 기업들이 추천된다. 예컨대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르면 부동산을 많이 갖고 있는 기업, 환율이 가파르게 떨어지면 원재료 수입 비중이 높아 환차익이 늘어나는 기업들을 추천한다. 데일리에 추천 종목으로 실리는 기간은 짧게는 2주,길게는 수개월이다.

이처럼 추천 종목을 제시하는 것은 많은 투자자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는 게 증권사들의 설명이다.

A증권사의 투자전략팀장은 "기업 담당 애널리스트는 나무(기업)만 보지 숲(전체 시장)을 제대로 못보기 때문에 주가 향방을 잘 예측하지 못한다"며 "투자 전략가들은 시장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단기 추천 종목을 제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투자 전략가가 단기 추천 종목을 제시하는 것은 이번 하이퍼정보통신 사건처럼 작전 세력이 활동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또 지점 고객들의 단기 매매를 부추겨 약정 수수료를 챙기겠다는 속셈도 깔려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B증권사의 리서치 담당자는 "지점 직원들이 약정을 많이 올리기 위해 자꾸 종목을 추천해 달라고 요구해 어쩔 수 없이 추천 종목을 제시한다"고 털어놨다.

◇어떻게 고쳐야 하나=전문가들은 증권사들이 데일리에 추천 종목을 제시하는 관행을 없애야 한다고 지적한다.

리캐피탈투자자문 李사장은 "증권사들이 단기 투자자들에게 특정 종목을 찍어주는 방식으로 리서치팀을 운영하면 증시의 체질이 개선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추천 종목을 결정하는 과정·방법이 좀더 투명해질 필요가 있다. 증권사들은 자사의 기업 담당 애널리스트들이 긍정적으로 투자 의견을 제시하는 종목 중에 좋은 종목을 골라 데일리 추천 종목으로 제시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번에 구속된 鄭연구원은 하이퍼정보통신을 투자 유망 종목으로 제시할 때 '듀얼모드 카메라 등 신제품의 매출이 본격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그 이유로 꼽았다.

내용이 너무 모호하다. 또 당시 鄭씨가 일하는 회사의 애널리스트는 하이퍼정보통신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가지수의 상승률과 비슷한 수익률을 낸다는 의미의 '마켓퍼폼(Market Perform)'을 제시했던 것이다.

또 증권사의 수익 구조를 소매 영업 중심에서 자산관리 등 다른 영역으로 다변화하는 게 중요하다. 미래에셋운용전략센터 이종우 실장은 "데일리에 추천 종목을 제시하는 것은 자사의 수익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투자자들도 단기 수익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재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