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몽골리안 뿌리 찾아 나선 始原문화 탐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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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지도책에서 몽골 국경을 넘어 러시아 땅으로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시베리아 밤하늘에 걸린 초승달 모양의 바이칼호(湖). 세계 최대의 담수호라는 바이칼을 계량할 수 있는 지리학적 수치들은 차고 넘친다.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1천6백37m로 지구상의 호수 중 가장 깊고 세계 민물의 20%, 식수의 80%에 해당되는 양의 물을 담고 있어 인류가 40년간 먹을 수 있다는 저수량.

길이 6백40㎞, 가장 넓은 폭은 80㎞, 남한 면적의 3분에 1에 이르는 넓이. 유일하게 민물에서 사는 바다표범 네르파를 비롯해 2천6백종의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의 보고(寶庫), 42m 깊이까지 들여다 보이는 1급 수질 등.

그런 정보를 아무리 나열한다 해도 소설가 출신의 이 저자가 1996년 이래 네차례나 바이칼을 찾아간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저자는 이미 두차례나 바이칼을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칼 한가운데 자리잡은 알혼섬을 찾아가자는 세번째 여행 제의에 "어떻게…그, 그곳을…?"이라며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고 들려준다. 바이칼은 그 앞에 설 때마다 외경을 느끼게 되는 살아 숨쉬는 신화이기 때문이다. 1만3천년 전 우리 민족의 조상들이 남하해온 본향(本鄕)이자 몽골리안의 시원지(始原地)라는 게 저자의 지론이기도 하다.

때문에 저자의 되풀이되는 바이칼행은 한민족의 원류에 대한 목마른 열망을 달래주는 주술적인 행위인 동시에 '사랑에 의해 상처받고 지식의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대는가 하면 영적인 진화는 가망없는' 남루한 현실에서 벗어나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이 된다. 책의 시작 대목에선 다소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지나 바이칼 공략의 교두보 이르쿠츠크시(市)에 이르면서 다채로운 빛깔의 여행기로 바뀐다.

바이칼에서 흘러온 앙가라 강과 제정 러시아 시대의 고풍스러운 바로크 양식 건물들이 어우러져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는 바이칼 남서쪽 이르쿠츠크는 우리와도 인연이 깊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유정』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의 비극적 사랑의 무대이기도 했고, 21년 고려공산당 창립대회가 열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창립대회가 열렸던 당시 귀족회의장 건물엔 지금은 레스토랑·미용실 등이 입주해 있다.

무엇보다 1825년 전제정치 폐지를 주장하며 페테르부르크에서 봉기했던 청년 장교들의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빼놓을 수 없다. 황제의 친국(親鞫) 끝에 7~9년 시베리아 노동유형을 선고받은 반란자들이 형기를 마치고 정착한 곳이 이르쿠츠크 주변이다.

뒤이어 사지로 떠난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행을 결행했던 데카브리스트들의 아내 열한명 중 일부가 어렵게 살아 남아 남편의 발목에 채워진 22㎏ 짜리 쇠고랑에 입을 맞췄다는 일화는 눈시울을 젖게 한다. 저자는 주립 미술박물관 등 이르쿠츠크 관광명소들의 간략한 소개와 함께 관람시간까지 정리해 여행가이드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신간의 절반 이상은 부리야트족, 예벤키족 등 북방민족들의 문화와 우리 문화의 친연성을 밝히는 데 할애된다. 솟대를 닮은 세르게 기둥과 우리 것과 똑같은 여자 무당의 무구(巫具)인 삼지창,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숭배하는 신앙,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으로 등장하는 기러기, 아이의 이름을 험하게 부르는 풍습 등이 두 문화의 연결고리로 제시된다.

학문적 검증이 뒤따라야겠지만 시원문화를 소개했다는 것만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듯하다. 손에 잡힐 것 같은 생생한 바이칼 현장 사진들,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감각적인 문체가 읽는 맛을 더한다. 작은 판형의 책이 이토록 고급스럽게 제작될 수 있다는 점도 보여준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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