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걸린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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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한민국은 지금 비상이다. 수재비상일 뿐 아니라 정치비상·시스템비상이요, 국론과 국력을 모으지 못하는 비상이다. 노쇠한 대통령은 지도력과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대통령을 대신해 국정 중심을 잡아야 할 국무총리는 아예 부재(不在)상태다. 국회는 여야간 전쟁터처럼 돼버린 지 오래 됐고, 정당간의 대선전은 이미 사활전(死活戰)이 돼버렸다. 웬만큼 법을 지키지 않는 불법·위법은 만성적 현상이라 둔감해도 좋다고 치자. 그러나 최고규범인 헌법 위반 시비가 끊이지 않아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총리가 없는 일종의 헌정변칙 상황이 와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이런 상태가 비상이 아니고 뭘까. 도대체 지금 이 나라는 누가 끌어가고 있으며 누가 책임지고 있는가. 대한민국은 과연 적절히 관리되고 있는가. 이런 물음들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수재대처 한가지만 봐도 그렇다. 수십년 만의 큰 재앙을 맞았으면 과거라면 대통령이 곧 현장을 시찰하고 필요한 조치를 즉석에서 긴급 지시하는 모습이 나왔을 것이다. 군부대를 동원해 지원하라든가, 식수가 없다니 생수를 긴급 공수하라든가 하는 조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대통령이 노쇠한 데다 총리마저 없으니 이런 모습 자체를 볼 수 없다. 그래도 국가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대통령이 현장에 가거나 안가거나 긴급조치가 취해져야 하지만 우리 경우 아직도 차이가 많다.

이런 상태로 12월 대선, 내년 정권교대로 간다면 끔찍한 일이다. 끝내 무한정쟁 속의 대선이 되면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현상이 나올 테고, 남은 6개월간 나라가 계속 비상상태로 가서도 안될 일이다. 지금과 같은 꽉 막힌 무한정쟁·헌정변칙 사태 등을 풀고 최소한의 시스템이라도 가동시키는 국면전환이 있어야겠다. 청와대와 여야 정당이 하기에 따라 일종의 '긴급휴전'에 합의할 수도 있는 일이다. 세가지를 제의하고 싶다.

첫째, 당장 총리 부재의 헌정위기 타개에부터 나서라는 것이다. 다수가 위헌이라고 하는 총리서리는 관행이라고 우기면서 다수가 합법이라고 보는 총리대행은 정부조직법상 불법이라는 것이 청와대의 주장이다. 총리 부재의 원인이 여기에 있는 만큼 한나라당은 즉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국회에 내기 바란다. 총리 궐위 때도 대행을 임명토록 규정을 보완해 빨리 대행이나마 임명함으로써 위헌 상황을 해소해야 한다. 다수 민주당 의원들도 총리서리가 위헌이라고 보고 있으므로 여기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이라도 개정안을 내고 내일이라도 통과시키면 된다. 법 개정으로 법적 근거가 명백해지면 청와대도 대행 임명에 체면이 선다.

둘째, 이정연 병역문제에 대한 여야의 자세도 이젠 달라질 때가 됐다는 점이다. 배후와 의도가 아리송한 전과자의 발언에 정계 전체가 놀아나고 있는 사실 자체가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한나라당은 김대업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당대표 이하 간부들이 쏟아져 나와 흥분할 게 아니라 부대변인급 정도 한사람에게 김대업 문제를 전담시키는 게 좋을 것 같다. 검찰청·청와대에서 시위를 하는 것도 꼴불견이다. 냉정하고 사무적으로 또박또박 따지고 해명하면 그뿐이다. 민주당도 김대업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인상을 주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그의 주장이나 폭로가 귀에 달다고 해서 무조건 지지하고, 심지어 '의인(義人)' 소리까지 나오는데 그가 정말 어떤 사람인가.

가만히 보면 민주당은 김대업 외에는 대선전략이 없는 것 같다. 여태 대선후보도 불확실하고 신당도 불확실한데 김대업 외의 대선전략도 빨리 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야는 아무리 대선 계절이지만 '일'도 좀 해가며 싸우기를 바란다.수해대책도 급하고, 남북관계의 달라진 모습이나 북·일간 정상회담 같은 변화도 명색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깊이 챙길 일이다. 저질 정쟁을 하더라도 이런 최소한의 '일'은 일대로 하는 겉모양이라도 보여야 할 것이다.

청와대도 그냥 있으면 안된다. 두사람의 총리후보가 거푸 국회에서 거부되고 여론과 시민단체들까지 국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을 보면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 책임 문제를 내부적으로 호되게 추궁해야 할 것이다. 내각제 국가라면 정권이 무너지는 상황이라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비상' 해제 또는 완화를 위한 각 세력들의 노력이 빨리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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