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너무 뜨거워져 있는 대통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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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호 02면

우리는 2차전지 강국이다. 휴대전화·노트북·자동차용으로 쓰는 전지 말이다. 일본이 압도했지만 최근 우리가 따라잡았다. 연말께 삼성SDI가 세계 1위, LG화학이 2위에 근접한 3위가 된다고 한다. 세계 시장 점유율이 곧 50%가 넘는다는 전망도 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기공식에 참석했던 곳도 LG화학의 자동차용 2차전지 공장이었다. 이토록 중요한 산업이 자칫 유산될 뻔했다. 2차전지는 1차전지인 건전지와는 판이하다. 그런데도 10여 년 전 LG와 삼성이 2차전지 진출을 검토할 때 건전지 업체들이 강력 반발했다. 건전지는 중소기업 업종이라며, 같은 전지인 2차전지에 대기업이 진출해선 안 된다고 했다. 정부도 한때 중소기업 편을 들었다. 이때 삼성과 LG가 진출하지 못했더라면….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김영욱의 경제세상

케케묵은 얘기를 꺼내는 건 대통령과 총리 때문이다. ‘친서민’ 기치를 높이 들면서 중소기업 편들기에 나섰다. 중소기업 고유 업종 제도 폐지 이후의 문제점을 조사하기로 했다. 너무 진보적으로 보일까 걱정할 정도로 중소기업에 관심이 많다고도 했다. 이쯤 되면 다음 수순은 ‘대기업 때리기’다. 대기업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단다. 어려우면 중소기업에 비용을 떠넘기고, 잘되면 이익을 독식한다고도 했다. 급기야 대통령은 롯데캐피탈의 대출 금리를 거론하며 “재벌이 일수 이자 받듯 고금리를 받는 건 사회 정의상 맞지 않다”고 질타했다.

정부가 벌이고 있는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특별조사는 그래서다. 중소기업이 살아야 서민경제가 산다. 그런데 대기업이 착취를 하고 있으니 중소기업이 살지 못한다는 논리다. 대기업이 번 돈을 내놓기는커녕 고리대금업까지 하고 있으니 서민이 살지 못한다는 심산이기도 하다. 영락없는 지난 정권 판박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부자와 서민으로 편가르기를 한 뒤 대기업 및 부자를 적대시했다.

부당행위 조사는 옳다. 중소업체의 납품 단가를 후려치고 기술을 빼앗는 행위는 근절돼야 한다. 하지만 조사에 감정이 실려 있다는 게 문제다. 대기업은 악(惡)이고 중소기업은 선(善)이라는 감정 말이다. 이렇게 접근하면 중소기업은 일방적 보호 대상이 된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보호 대상이 아니다. 중소기업 고유 업종을 20년 이상 지정했고, 40년 정도 보호정책을 폈는데도 경쟁력이 없다면 방향을 수정하는 게 맞다.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만 지원하고, 그렇지 않은 기업은 도태시키는 ‘집중과 선택’으로 가야 한다. 대기업을 혼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금융사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는 서민을 위해 미소금융을 하는 걸 탓할 순 없다. 단돈 얼마만 빌릴 수 있으면 신용불량자로 몰리지 않고, 가게 문을 닫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한 번만 도와준다면 지긋지긋한 빚의 사슬에서 벗어날 텐데라며 간절히 비는 사람들. 이들을 돕겠다는 위정자의 마음이야 누가 탓하랴. 하지만 그게 진심이라면 대기업의 팔을 비틀어 미소금융을 강제해선 안 된다. 돈을 많이 벌었으니 사회에 내놓으라는 심보라서다. 진짜 친서민을 하겠다면 기업의 자비(慈悲)에 기댈 일 아니다. 정부 돈으로 해야 한다. 고금리에 대한 질타도 그렇다. 돈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게 이자고, 무슨 소탕작전 하듯이 해선 고금리를 도려낼 수 없다는 건 경제사가 증명한다. 오히려 서민이 더 곤경에 빠질 수 있다는 것도 경제학은 입증하고 있다.

보수 정부니 보수답게 하라는 건 아니다. 보수건 진보건 경제는 경제논리에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가슴은 뜨거워도 머리는 차가워야 한다. 뜨거운 감정을 가슴에 품는 건 좋지만 그 감정이 정책이 돼선 안 된다. 친서민이면서 경제논리에 맞는 정책을 펴야 한다. 총부채상환비율(DTI) 같은 정책 말이다. 갚을 능력이 있는 만큼 돈을 빌리는 건 기본 상식이다. 이 상식대로 하면 집값도 안정된다. 하지만 이런 얘기가 이 정부에 먹힐 것 같지 않다. 친서민 기치를 들면서 대통령 가슴이 너무 뜨거워져 있어서다. 하긴 같은 여당 정치인도 사찰하는 판에 대기업 팔 비틀기가 대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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