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식 산악인·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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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1면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들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바쁘게 돌아쳤다. 늘 떨어져 사느라 오붓한 정도 느낄 새 없는 여동생에게 모처럼 오빠 구실을 한다고 다리 품을 꽤 팔았다. 누이가 서울 인사동에 조그만 터를 얻어 포도주 전문점을 낸다기에 프랑스에 사는 파리지앵으로서 한 수 거든 셈이다.

가게 작명도 큰 일이라면 큰 일이니 내 덕을 봤다고 말할 수 있다.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로마네꽁띠'를 주저없이 권해주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비싼 포도주 생산지로 이름난 그 지명을 포도주집 이름으로 하자는 내 제안을 누이는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그러고보니 나도 포도주 전문가라 자처할 만하다. 파리에서 포도주에 빠져 산다는 소문이 서울에까지 나서 출판사 한 곳과 포도주 기행문을 쓰기로 덜컥 약속을 해버렸다. 이래저래 포도주와의 인연이 애호가를 넘어 밥벌이로까지 연결되는 모양이다.

세상일이 다 그랬다. 산이 미치게 좋아 산을 타다 산 잡지 편집장을 했고, 산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애정으로 대하 산악소설 『백두대간』을 쓰고 있다. 10권 기약인데 겨우 2권을 냈으니 그것도 어서 마무리를 해야 한다. 85년에 냈다가 절판된 『사람의 산』은 다시 읽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2권으로 보완해 다시 출판하기로 했다.

매사가 다 아는 이들 사랑으로 맺어진다. 그렇게 만난 지인들과 하고 있는 '농심마니'회만 해도 그렇다. 가을이면 산에 산삼 뿌리를 잘 심어 뒤에 오는 사람들이 '심봤다'를 외치도록 하는 일도 벌써 16년째로 접어든다. 올해도 10월초께로 일정을 잡아뒀으니 그 뒷일을 의논해야겠지.

한국에 잠깐 나올 때마다 이렇게 할 일이 닐리리로 늘어진다. 하지만 이번 주말에는 비오는 하늘이 두 쪽 나도 꼭 해야할 일이 있다. 파리에서 내 지친 심신을 다독여주시던 홍세화 선생을 만나야 한다.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로 널리 알려진 망명객 홍선생은 올해 아예 서울로 들어와 한겨레신문에 입사하는 용기를 보여주셨다. 그 인생의 반전을 나는 존경한다. 잘 익은 포도주를 홍선생과 나누고 싶다.

또 한 분, 신경림 시인을 그 분이 좋아하시는 중국집에서 봬야 한다. 배갈 한 잔에 나누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얼마나 달짝지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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