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흔들리는 지역주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올해 대선 정국의 가장 큰 특징은 노무현 후보의 급속한 지지율 상승과 하락, 최근 정몽준 의원의 급부상에서 나타난 것처럼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신당 논의 결과에 따라 국민경선에 의해 뽑힌 여당의 대선 후보가 교체될 수도 있고, 제3의 정당이 출현할 수도 있는 안개정국이 계속될 전망이다.

또한 대선 정국의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병역비리 공방이 사생결단의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다. 여당은 병풍이 유일한 선거전략인 듯 병역비리 의혹 1천만 서명 운동을 시작했고, 한나라당은 대통령 탄핵 서명으로 맞서고 있다. 이래저래 국민은 불안하고 혼란스럽다.

이렇게 올해 대선 정국의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커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올해 선거에서 3金의 정치적 영향력의 쇠퇴와 지역주의의 약화 추세다.3金과 지역주의가 지배하던 정치는 많은 폐해는 있었지만 안정감과 선거의 예측 가능성은 매우 컸다. 그러나 올해 대선 정국에서는 3金의 영향력이 하락하고 동시에 지역주의의 응집력이 떨어지고 있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기존의 지역을 볼모로 한 정당 지지기반의 이탈이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하게 새로운 지지기반의 재편은 이뤄지지 않은 과도기의 상황이 여론의 가변성을 높이고 신당 논의 등 정계개편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고 있다.

올해 대선의 혼란과 불확실성을 일으킨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지지후보를 바꾸거나, 정하지 않은 부동층의 비중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부동층의 비중이 높은 이유는 지역주의의 약화도 원인이지만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높고 정치변화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정치권과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변화의 욕구가 강한 젊은 세대일수록 부동층의 비율이 높은 사실이 이를 나타낸다. 향후 대선 정국도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8월 10일 실시한 중앙일보 여론조사에는 응답자의 37%가 앞으로 지지후보를 교체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신당이 출범하게 되면 대규모의 지지후보 재편도 예상된다.

올해 대선에서 나타난 혼란과 불확실성이 얼마나 지속되고, 어떤 방향으로 정리가 될 것인지는 기존의 3金 정치와 지역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이를 주도할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는가에 달려 있다. 한편으로는 지역주의가 강화돼 과거의 정치로 퇴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할 희망적 조짐도 보이고 있다.

그 하나는 이념에 따라 정당과 지지후보를 결정하는 이념투표의 경향이다. 올해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국 사회의 진보-보수의 이념적 분화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고, 또한 이러한 이념적 편차가 정당과 지지후보의 결정에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다른 변화의 조짐은 세대정치의 등장이다. 여론조사들은 40대 이상은 이회창 후보 지지도가 높고, 20대와 30대는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의원을 선호하는 세대별 지지후보의 편차를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적인 변화의 조짐에도 불구하고 기존 정당과 정치인들의 다수는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새로운 정당의 정체성을 모색하기보다 기득권을 유지하고 구태정치를 계속하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는 현재 민주당과 정몽준 의원이 주도하는 신당 논의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신당 구상의 문제점은 새로운 인물과 비전도 없이 노선과 정당이 다른 정치인들을 끌어 모아 세 불리기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의 신당 추진은 정당정치를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명분과 원칙도 없이 신당을 꾸려 놓으면 국민의 지지율은 당연히 따라올 것이라는 정치인들의 착각과 오만함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민주당의 신당 구상이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당내 계파 경쟁과 이해득실에 따른 이합집산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신당 창당을 통해 당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 비전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 민주당이 사분오열돼 자멸하는 것은 민주당만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미래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