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않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나는 편지를 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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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1971부터 1988까지, 8백30여 쪽 두툼한 책 겉 표지에 찍힌 두개 숫자 바로 그 중간에 그의 오십여 평생 가운데 토막이 툭 잘려 놓여있다. 인권운동가 서준식(54·인권운동사랑방 대표·사진)씨가 첫 번째 옥살이를 한 그 17년 세월은, 한국 현대사로 보면 무지막지한 광기의 세월이기도 하다. 24세 청년으로 옥에 들어가 41세 장년이 되어 세상으로 돌아온 그의 잃어버린 시간 위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의 군화가 지나갔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쇠창살과 시멘트 담 안에 갇혀 실의의 날들을 보냈던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거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편지를 쓰는 일은 나의 논쟁 행위였으며 고해성사였으며 절절한 기도였으며 또한 즐거운 놀이였다. 나는 열심히 편지를 썼다. 절망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살아남기 위하여…".

그 17년 동안 서씨가 음산한 독방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쓴 편지모음인 이 책은 권력 및 기득권 세력과 완벽한 단절을 이루려는 한 인간의 꿈을 보여준다. 한 달에 한 장 지급되는 관제엽서와 봉함엽서에 검열과 숨바꼭질을 벌이며 한 자 한 자 마음을 새긴 이 편지들은 독재에 맞서 고통스럽게 전진했던 서씨의 '젊은 날의 자화상'이다.

"영실아, 보아라…'세상의 모든 어리석음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아 함께 끌어안고 신음한다'라는 나의 신조를 때로는 까맣게 잊고, 이 답답함에서 벗어나려고 앞뒤 헤아리지도 않고 광포하게 몸부림을 치곤 한다."

오빠들 옥바라지로 상처를 입은 누이 영실씨에게 83년 9월에 쓴 이 구절에는 사회에 먹히지 않기 위해-'체제 내화'되지 않기 위해-안간힘으로 저항했던 한 인간의 깊은 슬픔이 깔려 있다. 하지만 서씨는 동생들에게 끊임없이 '이 부도덕한 세상에서 자신의 몸을 수혜자가 아닌 피해자의 위치에 두어 달라'고, '언제나 아웃사이더로 남아 달라'고 메시지를 보낸다. 그 신호는 또한 국가폭력에 저항하며 옥안에서 힘겹게 싸웠던 그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꿈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당연히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금욕의 아픔'이 없는 진보주의는 없다."

1948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서준식씨는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민족'을 알기 위해 19세 때 한국으로 유학 온 재일동포 2세였다. 71년, 박정희 독재정권이 만들어낸 이른바 '모국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형 서승씨와 체포된 뒤 실형 7년을 마쳤으나 사상전향을 거부함으로써 다시 보호감호 10년을 보내야 했다. 그는 첫 출옥 3년 만인 91년,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으로 '보안관찰법' 폐지를 위한 도구가 되겠다며 다시 옥으로 갔고, 98년에는 제2회 인권영화제에서 제주 4·3 항쟁을 다룬 영화 '레드 헌트'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세 번째 옥살이를 했다. "나는 악법이 나쁘다는 걸 증거하기 위해 언제든 다시 감옥에 갈 각오가 돼있다. 나의 불복종이 정치권력에 얼마나 큼직한 상처를 내는지, 그 사건들이 모여서 미래에 어떤 악법 하나가 사라지는지, 그게 내 불복종의 최대 관심사"라고 그는 말한다.

"누구보다도 나와 같은 시대를 나와 같거나 비슷한 꿈을 안고 살았던 이들이 이 글들을 읽어주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젊었을 때 지녔던 꿈과 열정이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유효한 것임을 명심해 주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자가 그 어리석음을 끝까지 고집하면 현명한 자가 됩니다."

92년 절판됐던 이 책을 10년만에 되살려낸 김규항(야간비행 대표)씨는 "'이놈들아, 이게 책이다' 하는 마음으로 낸다. 객기일까. 그러나 때론 객기가 고전을 사수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고 덧붙였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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