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의 정치사회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지금 서울에는 '8·15 민족통일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1백명이 넘는 북한사람들이 와 있다. 그 사람들이 호텔방에서 우리 TV도 보고 신문도 읽으리라 짐작된다.신문 지면을 채우고 있는 '신병풍''신북풍' 공방을 보고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그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분열과 무질서를 보고 아마도 '남조선'이 곧 망하는 것 아닌가 걱정할 듯하다.

요즘 우리 정치권은 음모로 하루를 시작하고 음모로 그 하루를 마감한다. 짬짬이 조작과 의혹이 간주곡으로 삽입된다. 감히 음모공화국이라 불러도 무방할 지경이다. 하도 음모가 많으니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헷갈리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국민들은 서서히 음모에 무신경해져 가는 것 같다. 국민들의 혼을 빼놓기 위해서 음모론이 설쳐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해본다. 국민들을 혼돈으로 빠뜨리고 사회를 무질서로 몰아대서 건전한 정치적 판단을 흐리게 하기 위해 좋지 못한 일을 쉴 새 없이 꾸며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올해를 어떻게 시작했는가를 돌아보자. 월드컵과 대선이 있는 해이니 '정정당당'하게 '페어 플레이'를 하자는 것이 우리의 다짐이었다. 그 다짐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음모론의 광풍이 돛을 올렸다. 정치혁명이라 부르기에 족했던 민주당의 국민경선에서 노무현씨가 광주에서 이기자 이인제씨가 음모론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이후 음모는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지방선거와 재·보선이 끝나고 대권투쟁이 본격화하자 음모들이 창궐한다.

별 잘못도 없고 더구나 국민경선제를 통해 뽑은 노무현후보가 사퇴하고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니 후보 진영에서 "음모"라고 한다. 민주당이 신당을 창당한다 하니 한나라당이 "정치적 음모"라 한다. 김대업이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하자 "신병풍 음모"라 한다. 정몽준바람이 불자 "최근 남북의 밀월 관계는 J의원을 대선 후보로 띄우기 위한 청와대의 음모"라면서 '신북풍 음모'를 중단하라고 한다. 최근에 한 군사전문가는 '대한민국 김정일 통치 의혹'론을 제기해 음모론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음모가 돌림병처럼 만연하게 된 병리현상은 대권투쟁과 직결된다. 대권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우리 정치문화를 압도한다. 목적만 이루면 과정은 모두 정당화된다는 막중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대권이 승자 독식 게임이자 제왕적 대통령 창출 게임인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 게임은 무한경쟁이며,실제 수단과 방법이 '무한'하다는 사실이 역대 대선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정치권은 이제 무슨 일이건 일단 음모로 몰아붙이고 보자는 식이다. 이런 행위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 국민을 안하무인격으로 다루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국민들이 이 정도면 속아 넘어 가겠지 하는 얄팍한 계산이 들어 있다. 혹은 아무리 치졸하고 터무니없는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집권하면 그만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에 휩싸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통해서 치른 게임의 결과가 무엇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는 '병풍'으로 큰 곤욕을 치렀고 선거에 졌다. 김대중 후보는 '북풍'에 휘말려 고전을 했다.5년이 지난 지금 승패는 어떤가? 승자는 두 아들을 감옥에 보내고 자신은 병고에 시달리고 있다. 패자는 다시 전투에 나섰는데 악몽 같은 '병풍'이 또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 국민들은 환멸에 빠진 나머지 아예 투표장을 외면한다. 이것이 다 음모론의 죄업이라고 한다면 논리적 비약일까.

음모는 음모를 낳는다. 음모전에는 승패가 없다. 음모는 모두를 수렁에 빠뜨리는 악마다. 국민은 천사들의 게임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악마의 게임만은 하지 말라고 바랄 뿐이다. 그 작은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서라도 정치권이 음모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나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