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황동규 '적막한 새소리' 外:詩의 극한에서 만난 聖人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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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황동규 시인은 금년 봄에 독특한 내용과 모양을 겸비한 시편들을 발표하여 시적 감흥의 진면목을 과시한 바 있다.

시 한 편을 몇 개의 소제목으로 나누어 구성하고, 예수와 불타, 니체와 원효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하여 선문답에 가까운 대화를 주고받는 내용을 선보인 셈인데, '적막한 새소리'는 이러한 그의 작업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각각의 소제목을 가진 5장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1장은 "적막한 새소리"가 들려오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반쯤 숨겨진 곳에 다리가 놓여 있다"로 시작되는 그 풍경은 사실상 삶의 어떤 이치를 품고 있다.

시인은 그곳을 "들과 숲이 서로 밀고 당기다 놓아둔 곳"이라 묘사해 놓고 있다.

들판처럼 활짝 드러나지도 않고 수풀처럼 온전히 감추어져 있지도 않은 곳에 놓여있는 다리처럼 인생이란 알듯 모를 듯한 것이기에 "몸을 반쯤 일으켜/몸을 뒤척이려다"만 모양으로 놓여있는 돌멩이처럼 살아가면서 부질없는 몸짓밖에 보여줄 수가 없다.

더구나 시간의 풍경은 한층 쓸쓸하여서 "늦가을 저녁/산들이 긴 그림자를 거두어들일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생은 이미 소멸의 조짐을 보이는 황혼기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인생의 풍경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막 지우기 시작하는/적막한 새소리"는 그 자체로 깊은 뜻을 간직한 삶의 화두가 되고 있다.

작품의 2장부터 4장까지는 불타와 원효, 예수와 원효, 그리고 불타와 예수가 번갈아 나누는 선문답의 내용이 전개된다.

"적막한 새소리"가 세상의 온갖 인연과 생명의 부질없음을 일깨운다고 생각하는 불타가 "저 소리를 듣다보면/세상 온갖 풀과 인연이 마르고/다리 위를 건너기보다는/물위를 건너고 싶어진다"고 말하자, "물위를 건너"는 것 또한 대상에 대한 집착임을 원효가 일깨운다. 그러자 불타가 원효의 주장에 응수하여 "면벽(面壁)과 면산천(面山川)의 차이지"하고 내뱉는다. 관념적 깨달음(면벽)과 실체를 통한 깨달음(면산천)의 차이를 역설하고 후자의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다.

3장에서는 예수가 "마음의 죽음 앞에 서면/면벽이나 면산천이나 다 상처일세"라고 나서며 불타의 주장에 이론을 제기하고 4장에서는 불타와 예수의 우호적인 선문답이 전개된다. 그리하여 "적막한 새소리"에 대한 물음과 답변을 통해 점점 낮아지거나 사라지는 새소리가 "군데군데 끊긴 늦가을 물길", 그리고 "가죽잎새들을 말리다말다" 하는 바람의 속성과 하나로 겹쳐진다.

그것들이 환기시켜 주는 삶의 이치는 소멸의 잔상이 간직한 절실함이다.

사라지기 전에 미세하게 존재하는 기미를 보여주는, 또는 여운을 남기면서 사라져가는 자연의 풍경은 선문답과 어우러지면서 삶의 지극한 존재 가치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깨달음을 얻고 5장에서는 원효가 마침내 혼자서 "반쯤 숨겨진 곳에" 놓여있는 "다리"를 건넌다. 부질없는 몸짓이라도, 소멸로 다가서는 몸짓이라도 스스로 감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빈들 어둠에 잠기고/불빛 하나 새의 숨소리 하나 새지 않"는 소멸의 자리에서도 "허연 가새쑥부쟁이 얼굴" 모습이 떠오른다. "귀신처럼 흔들리고 있는" 그것은 이승에도 속하고 저승에도 속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미라처럼 그것은 저승으로 떠나간 삶이 이승에 남긴 마지막 절실한 잔상일 것이다.

이경호<문학평론가>

<약력>

▶1938년 생

▶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삼남에 내리는 눈』『풍장』 『버클리풍의 사랑노래』 등

▶현대문학상·한국문학상·이산문학상·대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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