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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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새 은행은 서울 시중의 부동자금 및 사장금(死藏) 흡수에 전력을 경주해 조성된 자금을 시급한 중소상공업 운전자금으로 융자코자 하오니 특별 인가해 주시기 바라나이다."

『서울은행 30년사』에 수록된 고풍스런 설립취지서의 요지다. 서울은행은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9년에 서울을 영업구역으로 인가된 최초의 지방은행이었다. 창립 당시 자본금 1억원, 14개 점포에 1백여명의 직원들이 받은 첫날 예금액은 2억9천6백만원이었다.

3공화국 이후 국영화되면서 전국은행으로 변신해 무난하게 성장하던 서울은행은 정부 결정에 따라 76년 8월 한국신탁은행과 합병, 서울신탁은행으로 간판을 바꿔달게 된다. 합병으로 갑자기 외형이 커지면서 87년에 시중은행 사상 최초로 총수신 5조원을 돌파하는 등 한때 외형 1위를 다투기도 했다. 그러나 영광은 잠시뿐 서울신탁은행은 오랜 시간을 두고 무너져 내렸다. 정부가 대출에 직접 개입한 관치금융에 경영진의 외형경쟁이 맞물리면서 은행은 골병이 들었다. 70년대 말의 율산이나 80년대 이후 잇따라 부실화한 범양상선·라이프주택·한보철강·진도그룹 등이 주거래 은행이던 서울신탁은행의 자산을 갉아먹었다.

이런 사정은 다른 은행도 비슷했지만 이 은행에는 악재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내부 불화다. 합병 후 20년이 지나도 서울은행파·신탁은행파로 갈려 반목했다. 서울은행 출신이 은행장이 되면 신탁은행 출신들은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옷을 벗었다. 와신상담 은행장에 오른 신탁은행 출신 인사는 비리혐의로 퇴직한 지 4년이 지난 왕년의 심복을 은행 상무로 복귀시키기도 했다. 90년대에 이같은 분열상은 절정에 달했다. 오죽하면 새로 취임하는 은행장마다 '내실 경영'에 앞서 '인화단결'이나 '화학적 융합'부터 강조했을까.

95년 간판을 서울은행으로 다시 바꾸고 재기를 시도했지만 이미 늦었다. 환란(換亂)이 터지자 공적자금 5조6천억원을 투입해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10년 전 1만명선이던 직원은 이제 4천명에도 못미칠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이런 전력 때문에 서울은행은 정부주도 합병의 실패사례로 꼽힌다. 그런 서울은행이 다시 합병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고 있다.

최근에 거론되는 대로 하나은행이 서울은행을 인수해 합병한다면 주체나 방식은 26년 전 서울신탁은행과는 확연히 다른 셈이다. 합병이 실제로 이뤄진다면 이번만큼은 성공하길 빈다.

손병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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