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문 연 서울시립미술관 출발부터 삐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이전 개관한 지 두 달여를 넘긴 서울시립미술관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다. 지난 5월, 서울 정동 옛 대법원 자리에 새 둥지를 튼 서울시립미술관(관장 유준상)은 문을 열자마자 학예연구사들이 감사에서 징계를 당하고, 기증품을 되돌려달라는 요구를 받는 등 건물의 칠 냄새가 채 빠지기도 전에 흔들리는 모양새다.

우선 미술관의 근간을 이루는 소장품 가운데 중심이 됐던 1980년대 민중 미술품 2백여 점이 뭉턱 빠져나갈 위기에 처했다. 지난 해 3월, 당시 고건 전 서울시장과 협약서를 쓰고 작품을 기증했던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사장이 최근 이명박 현 시장에게 협약 관련 요청서를 보내 "기증 의사를 철회할 수도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씨는 이 요청서를 보내면서 "1년여 전 협약서 내용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차라리 명예롭게 작품을 돌려받고 싶다"는 뜻을 미술관 쪽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증 철회 논란'은 미술관 관리를 주로 맡고 있는 행정직 공무원들과 전시를 기획하는 학예연구사들 사이의 의견 차이에서 빚어졌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 성격을 70년대 모더니즘과 80년대 리얼리즘으로 잡은 학예연구사들은 가나아트센터가 한몫에 기증한 민중미술을 소중하게 여겼지만, 공무원들 처지에서는 한때 정부를 비난한 내용을 담았던 그 작품들에 비판적인 눈길을 던질 법 했다는 얘기다.

이런 과정에서 협약서에 '가나아트 컬렉션'이라 이름붙여 별도로 구분해 상설·전시한다던 기증품은 아직 전시 공간조차 잡지 못하고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개관 무렵에 이 기증품을 소개하는 기획전으로 잡혀 있던 '현실주의 미술전'이 슬그머니 '2002 소장 작품전'으로 둔갑했고, 20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아예 홍보도 되지 않았다.

초청장은 커녕 전화 한 통 받지 못한 전시 작가들이 지난 2일 일부러 전시장을 항의 방문했을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문화부의 한 행정 관료가 "쓰레기 같은 작품들에 뭣하러 전시 공간을 주느냐"는 불만의 소리를 했다는 내용이 전해지면서 기증자와 작가들의 심기가 더 불편해졌다.

또 하나, 학예연구사들의 징계 문제에도 관리직과 전문직 사이의 힘 겨루기가 불똥이 됐다. 개관 전부터 서울시립미술관을 대관 중심으로 운영하자고 주장한 관리직 간부의 주장이 학예연구사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개관전의 막이 올라가자마자 마무리에 여념이 없는 전문직들에 대한 표적 감사를 실시해 중징계 1명, 경징계 2명이라는 실력 행사를 보여줬다.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면서 미술계에서는 서울시립미술관을 걱정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김달진미술연구소가 내는 『서울아트가이드』 8월호에 '서울시립미술관은 정말 개관했는가?'란 글을 쓴 하계훈 단국대 겸임교수는 "관장이 행정적 간섭이나 견제 없이 소신껏 일을 집행할 수 있어야" 하고, "능력있는 큐레이터가 마음껏 연구하고 전시를 기획할 수 있도록 행정적 뒷받침이 시급하다"는 쓴소리를 담았다.

정재숙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