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33) 폭동과 진압의 악순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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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련의 사건은 좌익의 거센 봉기(蜂起)를 의미했고, 막 첫 걸음마를 떼고 출범하는 대한민국에는 최초의 위기였다. 이 거센 파도를 넘어서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존망(存亡)의 위기에 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점에서 박 대령이 피살당한 과정을 훑어보는 게 중요하다. 그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대령 진급 축하연 자리를 마치고 잠을 자다가 죽었다. 초병이 지키고 있던 침실에서 누군가에 의해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처음에는 미스터리였다. 진급 축하연은 1948년 6월 18일 저녁에 열렸다. 제주읍의 ‘탐라관’이라고 부르던 식당이었다. 일선 지휘관들과 통위부에서 제주도에 파견된 장교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술잔이 자주 돌아 참석자 대부분은 모두 거나하게 취해 있던 상황이었다.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는 행렬은 6·25전쟁이 터지기 전에도 많이 이어졌다. 북한 지역에 거주하다가 남한으로 이동하기 위해 38선 경계선에 도착한 한 가족을 미군 병사가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남쪽을 향하는 팻말 표시판은 영문으로, 북쪽을 가리키는 내용은 러시아어로 쓰여 있다. [미 육군부 자료]

박 연대장이 침소로 돌아온 것은 새벽 1시쯤이었다. 그는 현재의 KAL호텔 맞은편 자리에 있던 연대본부의 숙소로 돌아온 뒤 바로 잠에 빠졌다. 그 옆방에도 장교 몇 명이 돌아와 잠에 들었다.

범인은 경계병이 잠 든 틈을 타 박 연대장의 침소에 들어와 M1 소총을 몇 발 쏜 다음에 도망을 쳤다. 신기한 것은 그 총소리를 모두 듣지 못하고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경계병이 뒤늦게 사태를 알아차린 뒤 비명을 지르자 모두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시 M1 소총은 막 부대원에게 지급된 상태였다. 수사팀은 M1 소총에서 발사된 탄환이 총신(銃身)을 빠져나올 때 긁히는 마찰 상태가 총기마다 다른 점에 착안해 모든 병사들에게 소총을 한 발씩 쏘게 한 뒤 탄환 마찰 모습을 대조하는 식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오리무중이었다. 일주일 동안 수사를 했어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 즈음에 투서(投書)가 들어왔다. ‘모슬포의 처갓집에 칭병하고 누워 있는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인 최모 상사를 잡아보면 사건 전모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문상길 중위와 그의 처, 그리고 최 상사가 모두 잡혀 왔다. 계속된 신문을 이기지 못해 이들은 결국 자백했다. 암살사건 전모와 연대 내 좌익 계보를 함께 털어 놓았다.

사건은 폭동 진압에 나선 11연대의 예봉을 꺾기 위해 제주도 인민유격대가 문상길과 협력해 실행한 암살이었다. 군의 강력한 진압을 피하기 위해 좌익이 처음부터 계획한 사건이었다.

암살이 행해지던 18일 밤의 11연대 주번사령 역시 남로당 세포였던 1중대장 정모 대위였다. 주번 부관은 문상길 중위와 함께 체포된 최 상사였다. 최 상사는 부대원 중의 한 병사를 포섭해 침소에 진입한 뒤 박 대령을 사살토록 사주했다.

박 대령 피살 사건은 좌익이 이미 군대의 내부 깊숙한 곳에 적지 않은 요원을 부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그 여파가 어떻게 이어질지 초미의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군은 좌익으로 인해 내부에서 먼저 붕괴할 수도 있다는 점을 박 대령 피살 사건은 보여주고 있었다.

그 후에도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박 대령의 후임으로 최경록 중령과 부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제주도에 와 토벌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피는 반드시 피를 부른다. 국군의 진압 작전이 다시 펼쳐지면서 제주도는 다시 그런 피바람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반란 주동자들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주민들에 대한 소개(疏開)작전이 이어져 130여 개의 산간 마을이 불타고 8만여 명의 피해주민들이 발생했다. 강력한 군사작전의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군은 철저한 소탕전(掃蕩戰)을 벌였다. 특히 산악 지역과 해안 부락 중간인 중산간 지역의 피해가 컸다.

이 당시의 좌익 반란 혐의자들을 철저하게 찾아내 없애는 과정에서 그곳 부락민들의 피해가 자연스레 많아졌다. 겨울의 추위를 앞두고 벌판으로 내몰린 주민들은 해안 부락을 찾아 친척들에 의지하거나 수용소 생활을 했다. 모두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해 말에 현지 토벌작전을 벌였던 당시 2연대의 연대장 함병선 중령은 “제주도에 부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선무(宣撫)공작이었다. 전임 부대들이 중산간 부락을 초토화했기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민간의 피해는 커지고 있었지만 좌익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았다. 군 병력의 추가 파견이 필요했다. 그러나 순조롭지 않았다. 좌익이 군 내부에 아직 많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불거졌다.

이른바 ‘여순 반란 사건’이었다. 제주도 에 여수의 14연대가 병력을 파견하면서 일이 발생했다. 그해 10월 19일 여수의 14연대 병영에서는 때 아닌 총성이 울려 퍼졌다. 박진경 대령의 피살 사건은 연대장 한 명을 없애기 위한 좌익의 준동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군 병력의 일부가 총부리를 아군에게 직접 겨냥한 조직적인 반란이었다. 19일 밤 급격하게 14연대 병영에서 울려 퍼진 비상 나팔 소리, 그것은 이 땅 위 좌익 반란의 제2막을 알리는 날카로운 외침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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