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끝>제2부 薔薇戰爭 제5장 終章:봉분도 없는 '신라 명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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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한편 김양은 염장이 소금에 절여온 장보고의 수급을 홀로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실로 오랜만이요, 장 대사."

장보고의 수급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홀로 술을 마시던 김양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장보고 앞에 내어놓으며 세 번을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그대의 다리는 어디에 두고 이처럼 머리만 홀로 오셨는가."

두족이처(頭足異處).

참수를 당하여 머리와 다리가 따로 떨어진 장보고의 해골을 바라보면서 마음껏 승리감에 젖어있던 김양은 곧 다시 큰소리로 세 번을 울면서 말하였다. 아버지의 울음소리에 크게 놀란 딸 덕생이 달려와 물어 말하였다.

"어찌하여 아버지께서 통곡을 하시나이까."

그러자 김양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영웅미사심(英雄未死心)이라 하였다. 천하의 영웅이었던 장보고대사께오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서 이처럼 비참하게 죽었으니 내가 어찌 슬퍼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 마음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음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왕생극락하시오."

김양은 장보고의 목 앞에 술잔을 세 번 바치고 나서 자신의 딸 덕생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제 궁중으로 들어가 대왕마마의 차비가 될 것이니, 몸과 마음을 정결히 보존토록 하라."

이로써 김양은 장보고를 죽임으로써 낭혜화상으로부터 점지 받은 천하의 권세를 얻게 된 것이었다.

장보고의 딸 의영 대신 자신의 딸 덕생을 문성왕의 차비로 간택시킴으로써 '계집 셋을 통해 반드시 세(世)를 이룬다'는 낭혜화상의 참언은 마침내 완성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사기는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문성왕 4년 3월.

아찬 위흔(김양)의 딸을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한편 목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한 장보고의 딸 의영은 그것으로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지금도 현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염장이 장보고 장군의 목을 베어 돌아간 후 장군의 딸 의영이 울면서 아버지의 베개로 머리를 대신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장보고의 군장들과 가족들은 장보고의 시신을 청해진에 묻었는데, 후일을 생각하여 봉묘를 만들지 아니하였다.

지금도 완도의 장좌리에는 '장군묏동'이란 이름의 묘지가 남아있다. 이곳은 예부터 공동묘지로 쓰인 곳으로 어린 아이가 죽으면 독장을 하거나 풍장을 하던 곳인데, 현지 사람들은 이 등성이 어딘가에 '목 없는 장군 묘'가 있다고 말하고, 이 장군 묘야말로 장보고의 무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로써 당나라의 시성 두목으로부터 '나라의 한사람이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저 나라를 망치는 것은 어진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망할 때를 당하여 어진 사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능히 장보고와 같이 어진 사람을 쓴다면 한사람으로 족할 것이다'라는 찬사를 들었던 장보고, 또한 구양서와 더불어 『신당서』를 편찬하였던 송대 최고의 문장가 송기(宋祁)로부터 '사사로운 원망과 해독으로서 서로 끼치지 아니하고 나라의 우환을 먼저 생각한 것은 진나라의 기해(祁奚)가 있었고, 당나라의 분양과 장보고가 있었다. 그러니 누가 동이에 영웅이 없다고 할 것인가'라는 극찬을 받았던 영웅 장보고는 목 없는 장군으로 비참하게 생애를 마친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는 비록 천하의 권세는 얻지 못하였을지라도 죽어서 신라의 명신이 되었으니, 일찍이 김양이 꿰뚫어 보았던 대로 장보고는 비록 자신의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중도에서 비참하게 죽었으나 그 마음, 그 뜻만은 오늘날까지 살아서 바다를 지키는 해신(海神)이 되었음일까.

남해의 바다는 오늘도 여전히 푸르고 파도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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